강단사색 원고를 부탁받고 생각해 보니 10년 전쯤에도 한 번 원고를 실었던 기억이 났다. 그때는 학교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떤 이야기를 쓸 것인가를 고민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과연 강단에서 사색할 시간이 있는가를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짧은 시간 동안 대학 사회는 많은 변화를 요구 받았고 그에 적응하기를 허덕이면서 나는 사색 또는 고민을 할 시간들이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항상 나를 고민하게 한 것은 교수의 역할이었던 것 같다. 강단에 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선배 교수의 정년 퇴임식에 참석하여 들은 이야기가 그 때 이후로 10년 가까이 항상 내 마음을 누르고 있다. 퇴임하시던 교수님이 스스로 자신에게 던진 학자로서 교육자로서 연구자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았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 교수는 학자이며 교육자이며 연구자이어야 한다는 말이 사는 내내 나를 이렇게까지 힘들게 할 줄 몰랐다. 학자로서 나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소신 있게 할 일을 하면서 살았는가? 대답은 부끄럽게도 아닌 것 같다. 그러면 교육자로서 항상 강의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학생들과 같이하는 시간을 즐거워하며 내 삶의 보람을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서 찾고자 하였는가? 이 또한 자신이 없다. 마지막으로 연구자로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한 줄의 데이터를 해석하기 위하여 하얀 밤을 보내는 정열이 있었는가 하면 그 또한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참 하루하루가 바쁘다. 강의하고 학생들 행사에 참석하고 대학원생들 실험 지도하고 외부에 다니면서 연구비 수주하고 하다 보면 벌써 종강이고, 방학 동안 논문이라도 쓰겠다고 앉아 있다 보면 새 학기다. 물론 이렇게 지내다 보면 교육자로서 한 학기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자로서 논문을 발표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 안 어디에도 열정이 담겨져 있지 않은 것 같은 현재의 모습이 나를 당황하게 한다. 이런 때에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링컨 대통령의 유명한 말은 갈수록 기본에 충실한 사람들만이 좋아지는 나를 더욱 더 혼란스럽게 한다. 점점 더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한 채 오로지 연기 잘하는 배우가 좋고 노래 잘 하는 가수가 좋으며 공부 잘 하는 학생이 좋다. 경험이 늘어 가면 타인을 보는 포용력이 커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편협해 지는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면 나는 사람들이 나를 더욱 더 편협한 시선으로 봐주면 좋겠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편협한 시선으로 나를 보면서 내 얼굴과 몇 마디의 대화 속에서 내가 교육자이며 연구자이며 학자라고 생각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면 너무 과한 욕심일까? 교수는 잘 가르치면 되고 학생은 공부 잘 하면 된다는 이면 속에 숨겨진 교수와 학생이라는 호칭의 수없이 많은 다른 의미가 있음을 어렴풋이 생각할 때, 교수는 교수다워야 하고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말이 하나의 이상향을 꿈꾸는 것처럼 생각된다면 내가 잘못된 것일까 반문해 본다.
박희승 교수
생명자원공학부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