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아테네의 소피스트들은 상대적인 진리를 추구했다. 시민들에게 처세술을 가르치며 부와 명성도 함께 품었다. 절대적인 진리를 믿었다고 전해지는 소크라테스는 그의 철학만큼이나 ‘앎’에 대해 엄격했던 듯하다. 진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걸었으니 말이다.
 

  저자는 위 양자의 ‘앎’과 ‘삶’에 대한 자세를 모두 받아들였다. 키 큰 나무 꼭대기에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은 부를 따기까지는 괴로움을 참아내며 오르기를 반복해야 하는 사회. 공부가 그저 오르는 데 쓰이는 수단이 돼버린 것을 비판하는 데 팔을 걷어붙였다. 그러면서도 공부를 하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면 결과 역시 자연히 따라올 것이라는 게 저자의 희망적인 시각이다.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맥락을 생각하지 않은 맹점이 있는지 몰라도 ‘공부’를 향한 그의 시선이 순수하기 그지없다.
 

  지혜가 아닌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에 신물을 느낀 저자는 스스로 학습서가 아닌 고전을 통해 공부했다. 책의 제목도 ‘독서란 무엇인가’가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학문에 몸담는 사람답게 현학적인 문체와 자신이 집중하는 바를 뿌리까지 캐내려는 집념이 글 전반에 감돈다. 저자는 동서양의 공부법이 지나온 길을 짚은 뒤, 진정한 공부법은 어떤 것일지를 제시했다.
 

  역사적으로도 공부는 ‘독서’를 하는 행위로 여겨졌다. 서양 중세 때의 성서도 조선의 사서삼경도 여러 번 익힌 뒤에야 비로소 학자로서 ‘책을 읽었다’는 말을 꺼냈다. 그들에겐 책을 대하는 겸손한 마음과 ‘앎’을 통해 자신을 닦으려는 겸허한 자세가 배어 있었다.
 

  학자들이 읽었던 책은 주로 인격과 마음가짐을 다듬는 법을 담고 있다. 왜일까를 생각해 보면 답은 간단하다.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타인이 모여 이루어지는 사회에서는 서로에 대한 공조가 기본이기 때문이다. 물론, 법으로 인간을 다스려야 한다는 성악설론자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겠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사회가 건강할지는 의문이다. 지금 시대의 공부가 남을 제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은 지식만을 다뤄서인 건 아닐까.
 

  공부가 언뜻 관념적인 활동에 그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공부만큼 이타적이고 실용적인 것도 없다. 멀리뛰기를 할 때 몸을 안으로 굽히고 팔을 뒤로 저어야 앞으로 뛰어오를 수 있듯 자신의 내면 깊이를 앎으로써 타인에게 그리고 세상을 향해 뜻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그 바탕이 되는 씨앗들이 책 속에 쏙쏙 박혀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해서까지 우리는 책상을 떠날 수가 없다. 과연 무엇을 위한 공부를 하고 있는 걸까? 자신만의 틀을 짜낼 도구를 책들 사이에서 골라 보길 바란다. 분명 그 견고하고 성근 질기에 사회의 뻔한 틀은 잊히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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