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신도의 성지인 이세신궁은 20년에 한번씩 새로 지어진다. 목수들은 멀쩡한 건물을 부수고 아예 장소까지 옮겨 새로 짓는다. 짓고, 부수고, 또 새로 짓는다. 이 지난하고 기이한 과정을 지켜보며 많은 이들이 해석을 내놓았지만 가장 매혹적으로 다가온 설명은 '황천의 개'에 실린 후지와라 신야의 말이다. 후지와라 신야에 따르면 일본인들이 전승하고자 하는 것은 건물 그 자체가 아니라 건물을 짓는 기술이다. 목수들이 남겨줘야 할 것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멋진 작품이 아니라 언제라도 이세신궁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인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대목에서는 ‘네 자신의 결정을 존중한다’며 한걸음 물러선다. 우정을 과시하지만 자신이 책임질 수 없다는 이유로 발을 뺀다. 그 과정에서 청년들은 실제적인 조언과 충고로부터 단절된다. ‘돈’과 ‘아파트’ 말고는 전 세대로부터 물려받는 것이 없는 사회. 엄기호는 이런 한국사회를 ‘망한 사회’라고 평한다.
 

  “외롭다”는 절규와 한탄이 한국 사회를 마구 할퀴고 있다. 누군가는 ‘관계의 단절’이나 ‘관계의 파편화’라고 자위하고 제 혀로 상처를 핥으며 버틴다. 그러나 누구도 “왜 나는 외로운가”라는 물음은 던지지 않는다. 외로움을 인간 본연의 원죄로 여기며 살아가는 거다. 그렇게 달팽이처럼 외로움을 지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엄기호는 말한다. 우리가 외로운 이유는 모든 관계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라고. '단속사회'(창비 펴냄)는 우리가 맺지 못한 ‘어떤’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 일러스트 계민경 학생.

  사적인 경험을 공적인 언어로 전환하는 관계에서 ‘경험’이 전달되기에 사회는 ‘사회’일 수 있다. 그러나 사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기대하기보다는 사회적으로 발생한 문제들에 대해 사적인 해결책을 추구하게 된 사회로 변화하며 사회는 무너졌다. 이제는 만남의 공간이었던 길이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기능화된 선으로 바뀐 것이다. 배움의 가능성을 잃어버린 사회. 그 사회에서 인간은 외로움에 거친 숨을 헐떡이고 있다.
 

  타인의 경험으로부터 배움을 얻는 사회로부터 튕겨져 나간 개인들은 서로의 일에 개입하지 않을 뿐더러,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자기의 삶을 제어한다. 끊임없이 단속하며 형식적인 예의를 갖추는 속에서 공론장은 무너지고 우리는 서로 예의바른 얼굴을 한 채 상대의 속을 알 수 없는 적대의 공간에 선다. 남는 건 ‘취향의 공동체’와 ‘취향 존중’의 문화, 그리고 고독을 생방송하는 SNS의 게시글뿐이다.
 

  대한민국의 민낯을 과감하게 드러낸 엄기호가 내린 처방전은 명쾌하다. ‘곁’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취향공동체’도 ‘(내) 편’도 아닌 ‘곁’이라는 단호한 선언이다. 낯설고 모르는 것과 부딪치고 만나며 경험을 확장할 수 있고, 본인의 경험을 공적인 언어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사회. 다르지만, 다르기에 배울 수 있는 타인이 내 곁에 있는 세계. 엄기호의 진단은 엄격했지만 처방만큼은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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