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 분주한 봄날을 보내고 있다. 하늘을 보며 심호흡한 게 언제였는지 느릿느릿 산책하며 생각에 잠겨 본 게 언제였는지 까마득하게만 느껴진다. 이번 학기 수업은 시와 소설을 마음껏 읽어야 하는 수업이지만 정작 나의 삶은 비문학적인 발자국들로 가득하다. 혼자 있는 시간, 온전히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시간이 절실한 요즘, 부쩍 생각나는 시가 한 편 있다.

아무도 모르게 체조 선수가 되었다.

옷 속에 팔과 다리를 잘 집어넣은 채로
나는 태연하게 걸어 다닌다.

잠 속에서만 팔다리가 길어진다는 건
억울한 일이지만
줄 없이도 줄넘기를 할 수 있는 밤들.
나쁘지는 않다.

달리면 나 대신
공중의 시간이 부드러워지지만
아주 약간일 뿐.
내가 나에게로
어이없이 돌아오는 일은 없다.

세상에는 언제나
한 명의 체조 선수가 부족하고
나는 심장이 뛴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무척 아름답고 투명한 일이다. 
  

                                           -신해욱, 비밀과 거짓말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비밀. 그런 것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비밀 하나쯤 품지 않은 인생은 삭막하고 단조로울 것이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니 말하고 싶지 않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 모든 비밀이 다 아름답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도 모르게 체조 선수가 되”는 비밀 같은 것은 척박한 삶에 숨 쉴 틈을 마련해 주는 즐거운 비밀이 아닐 수 없다.


  “아무도 모르게 체조 선수가” 된 ‘나’는 “옷 속에 팔과 다리를 잘 집어넣은 채로” “태연하게 걸어 다닌다.”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는 비밀을 품게 된 ‘나’는 남들과 다른 몸을 지니게 되었지만, 다르지 않은 척 태연하게 살아간다. 비밀 하나를 품자 지루하고 따분한 일상이 다른 빛깔을 띠기 시작한다. 언제든 남 몰래 나만의 비밀을 꺼내 볼 수 있고 그로 인해 웃음 지을 수도 있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비밀. 이 비밀을 입 밖에 꺼내는 순간 그것은 거짓말이 된다. 그러니 “잠 속에서만 팔다리가 길어진다”. 그것은 조금 “억울한 일이지만” 어디서든 “줄 없이도 줄넘기를 할 수 있는 밤들”을 경험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쁘지는 않다.” 달라진 내 몸이 내가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을 좀 더 부드럽게 바꾸기도 하지만 “아주 약간일 뿐”이다. 내 안에 다른 몸을 품고 있으므로 “내가 나에게로/어이없이 돌아오는 일은 없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 
 

  내가 아무도 모르게 체조 선수가 되었기 때문에 “세상에는 언제나/한 명의 체조 선수가 부족하”다. 그 비밀을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심장이 뛴다.” 그것은 비밀을 품은 자의 떨림이자 설렘이며 살아 있음의 표지이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무척 아름답고 투명한 일이다.”
 

  신해욱 시인은 세상의 가치로는 측정할 수 없는 비밀과 거짓말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세상의 가치에 길들여진 몸이 나의 전부라면 너무 끔찍한 일이다. 다른 몸을 사는 비밀을 품음으로써 나의 존재는 아름답고 투명해진다. 그 비밀 덕분에 딱딱한 나의 세상이 조금은 부드러워질 것이다. 이처럼 아름답고 투명한 비밀과 거짓말의 세계야말로 시의 세계가 아닐까.
 

  ‘나’로 환원되지 않는 신해욱의 시적 주체는 ‘미성년’이 아니라 ‘비성년’의 주체라 부를 만하다. 어른의 세계를 거부하는 사람. 그는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아이와는 분명히 다르다. 갑갑한 일상을 벗어나 저 멀리 어디로든 달아나고 싶어질 때, 나도 슬며시 내 안에 비성년의 몸을 품어 보련다. 팔다리가 길어지는 체조 선수여도 좋고, 이목구비가 따로 노는 자유자재한 몸이어도 좋고, 하늘을 바라 한없이 길어지는 목이어도 좋다. 상상만으로도 조금은 즐거워지지 않는가?
 

이경수 교수(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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