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강 시간 뭐할까?’에 대한 고민은 어쩌면 대학생들에게 수업에서 주어지는 것보다 더 큰 과제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공강시간이 그저 밥만 먹거나, 먹고 남는 나머지에 부족한 수업을 보충하는 시간일 수 있지만 사실 대부분의 누군가들은 청춘을 그리 빡빡하게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학교 앞은 공강시간을 나름대로 풍족하게 보낼 수 있도록 공간의 다양성이 보장되었다. 병원 건너편의 오락실에서는 흑석동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나이를 가리지 않고 바쁘게 손을 움직였고, 골목골목 자리하던 만화방에는 계란 풀린 라면을 먹으며 만화책을 보고 있는 학생들이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운동을 좋아하는 학생들은 자이언츠와 대운동장에서 공굴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저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군대에 다녀왔을 뿐인데, 병원 건너편에 있던 오락실이 없어지고, 골목골목 자리하던 만화방이 사라지고, 심지어 자주 가는 피씨방조차 자취를 감췄다. 그것들의 빈 공간은 이제 모두 카페와 술집이 자리하고 있다. 운동장은 말할 것도 없이 이미 공사판이다. 이들 모두는 필자가 공강시간을 즐기던 공간이기에 서두에 던졌던 고민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의미는 차이에 의해 발생한다.’ 같은 시간에 같은 일만 반복하게 된다면 처음에는 그것이 여유나 기쁨이더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지루하고 뻔한 일밖에 되지 않는다. 삶의 안정을 바라는 지극히 정적인 사람들조차도 가끔은 이것도 해보고 싶고 저렇게도 변주를 울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곧 그러한 차이가 우리에게 있어 기억에 남는 시간, 즉 추억이기 때문이다.
 
밥을 먹고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수업이 모두 끝난 후에는 술을 마시는 대학에서의 규격화된 일상은 언젠가 지루함을 가져오고, 모두가 한 번쯤 다른 무언가를 찾게 되는 과정을 밟는다. 차이 없는 일상에 대해 환멸감을 느끼며 두리번거리다가 흑석동이라는 작은 공간에 술집과 카페와 노래방과 당구장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지루함 속에 파묻힌다.
 
대학은 학문과 연구에 그 적을 두지만 이면에서 그러한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문화를 주도하는 모습 또한 가지고 있다. 곧 대학생 모두는 문화를 주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대학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동아리와 소모임만 보더라도 이러한 존재 이유를 간직하고 있다.
 
문화의 경쟁력은 다양성에서 나온다는 것에 이견을 다는 이는 매우 적다. 어떤 이에게는 아주 작은 차이에 불과할 수 있으나 카페와 술집만이 존재하는 지금의 흑석동은 예전과 비교해 다양성이 줄었다. 수도 없이 많은 종류의 동아리들이 소외받고, 취업을 위한 공모전과 인턴 모집의 전화통만이 불티나게 울리는 것 또한 다양성의 감소다. 필자가 학교에 다니기 이전에는 어떤 다양성이 더 존재했을지 모를 일이다.
 
결국 수요와 공급의 논리에 따라 발길이 끊기는 곳은 사라지고, 사라졌기에 갈 수 있는 곳이 적어지는 악순환의 반복이지만 이러한 모습이 어쩌면 다양성과 함께 문화의 주도권을 상실해가는 대학생의 현주소를 대변하는 것은 아닌가 한다. 수없이 많은 개성을 누르고 솟아나는 흑석동의 카페와 술집은 개성을 감춘 채 모두가 똑같이 알파벳을 외우고 원하지 않던 곳의 문을 두드리는 우리 세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결과물이다.
 
다른 모든 문제는 뒤로하더라도 개성 없는 사회는 심심하다. 지루한 것은 기억에서 사라지고 아무런 추억도 남기지 못한다. 오늘도 하염없이 카페에 시체처럼 앉아 오지 않는 즐거움을 기다리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변화를 조금씩 실천해보는 것은 본인의 행복과 대학과 문화를 위해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대학생활이 조금 더 즐거움으로 가득 찼으면 하는 어느 복학생의 후회 섞인 푸념이었다.
 
이상준 학생
역사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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