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MBC<느낌표>라는 프로그램 안에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이하 <책을 읽읍시다>)라는 코너가 있었다. 책을 읽는 사람이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 제작진이 전철, 버스,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그 주의 선정 도서를 읽은 시민을 찾는 것이 코너의 포맷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큰 인기를 끌었고 선정도서들은 서점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진열되었다. 10년이 지나 얼마 전, <책을 읽읍시다>와 동일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움직임이 SNS를 달궜다. <전철에서 책 읽는 사람 찾기> 운동이 그것이다. 전철에서 스마트폰이 아니라 책을 보는 시민을 찾으면 그의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것이 이들의 방식이었다. 이들을 소개한 한겨레 기사의 논조는 이들에게 퍽 호의적이었다. 그런데 인터넷 상의 반응은 기사와 사뭇 달랐다.
 
페이지에 자랑스럽게 게재된 몇 장의 사진에는 시민들의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 없이 그대로 나와 있었다. ‘어디어디를 지나는 몇 호선 지하철, 20대로 보이는 여성분과 같이 그들이 찾아낸 시민의 인상착의를 자세히 묘사한 경우도 있었다. ‘어떠어떠한 말이 나오고 일본 책인데 혹시 아시는 분과 같은 트윗은 남이 읽는 책, 남의 사생활에 왜 저렇게 관심이 많은가 하는 의문을 남겼다. “스마트폰이 아니라를 강조하는 어법은 전철을 탄 사이에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다는 이유 하나로 불특정다수의 시민을 인문학의 주적으로 칭할 수 있냐는 반문을 낳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도촬당한 당사자들의 항의는 계속 밀려들었고 그때마다 사진들은 하나하나 내려갔다. 마침내 <전철에서 책 읽는 사람 찾기>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자정하겠다는 글이 올라왔다. 지금 이 운동은 불특정 다수의 시민이 아니라 페이지 회원들이 전철에서 읽는 책을 찍어 올리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두 개의 운동 중 하나는 인기를 끌었고 하나는 비난을 받았다. 어느 한 쪽의 주장이 일방적으로 옳거나 그른 데에서 이 차이가 발생한 게 아니었다. 문제의식 자체를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서점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은 토익 책이나 자기계발서 뿐이고, 한 사람이 1년에 채 50권의 책도 읽지 못한다는 말은 이미 새로울 것 하나 없는 문구가 되지 않았던가.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책을 읽자는 이들의 목소리는 옳았다’. 차이는 이들의 방식에 있었다. 시민들의 동의를 구했는가, 아니면 이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무기로 삼아 그저 밀고 나갔는가.
 
당연한 이야기를 하자. 하려는 말이 옳다고 해서 그 말을 어떤 방식으로든 해도 되는 건 아니다. 의도가 아무리 옳아도 모든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내가 아무리 옳아도 나의 모든 폭언이 용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 당연한 이야기들이 쉬이 간과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포털 사이트 댓글들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언어들로 가득하고, 폭언과 욕설들은 솔직함과 진실이라는 말로 포장된다. ‘내가 옳다는 말 앞에 개인의 초상권이 잠시 무시되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옳고 누군가에게는 그른 문제들 앞에 사람이 사람에게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를 무시한 언어들이 범람한다. 너는 불의하고 나는 옳으며, 옳다는 말이 면죄부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과 글은 의사소통이고, 사람과 사람이 생각과 감정을 나누는 방식이다. 우리는 많은 말을 하고 많은 글을 쓰게 될 것이다. 내 생각에 옳지 않은 어떤 것에 대해서라면 다소 공격적인 글을 쓸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말들에 앞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 반드시 지켜야 할 선이 그것이다. 주장하기에 앞서 누군가의 초상권과 사생활을 생각하는 과정, 옳은 말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말들을 옳은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김민주 학생
국어국문학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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