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마산의 산골짜기에서 연출가의 꿈을 키워왔던 최상식 동문이 그 주인공이다. 1971년도 KBS드라마 PD로 입사해 현재 수많은 후배들의 지도자가 되기까지 한국 드라마의 산증인이 된 최상식 동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여의도 KBS본관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최상식 동문.
 
 30여 년 동안 굵직한 한국드라마들의 연출과 기획을 도맡았던 최상식 동문에게 여의도 KBS는 지금도 익숙한 곳이다. 중대신문은 여의도 KBS에서 최상식 동문을 만나봤다.
-요즘도 여의도 KBS를 찾는 편인가.
“현직 시절 같이 일했던 후배들이 지금은 KBS드라마를 직접 연출하고 기획하는 인력들이다. 그 후배들이 드라마 제작 관련해서 나에게 자문을 구하는 편이라 가끔 여의도 KBS드라마 별관을 찾곤 한다.”
-은퇴 이후 모교에서 교수직을 맡기도 했다.
“은퇴했던 2002년도부터 10년간 중앙대 미디어공연영상대학 학장을 역임했던 적이 있다. 아직도 4학년 전공 수업을 하나 맡고 있어 매주 수요일마다 모교를 찾아오고 있다. 지금은 한국예술원이라는 학점제 대학에서 명예학장을 맡고 있다.”
 
 최상식 동문이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건 수십 년의 연출경험이 바탕이 됐기에 가능했다. 그가 연출자로서 첫 단추를 꿰게 된 배경이 궁금했다. 
-어린 시절 어떤 학생이었나.
“경상남도 마산의 산골에서 자랐다. 내가 학창시절을 보냈던 1950년대의 대한민국은 6.25사변 직후라 가정형편들이 어려웠고 우리 집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들과 다르지 않게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래도 남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걸 참 좋아했었는데 그게 연출자의 길로 나아가게끔 한 초석이 되었던 것 같다.” 
-연출자의 꿈은 언제부터 키웠나.
“학창시절 <벤허>같은 명화들을 보면서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이후로 고등학교 때 연극반에 들어가면서 진로를 연극배우로 초지일관했다.”
-학부에서도 연극배우의 꿈을 이어나갔나.
“연극배우를 너무 지망했던 만큼 학부 1,2학년 때는 연기를 정말 많이 했었다. 그러나 연기는 나와 적성이 맞지 않다는 걸 알고 3학년 때부터 연출로 진로를 전향했다.”
-왜 연출로 전향했나.
“어릴 때는 배우가 연기와 연출을 동시에 하는 줄 알았다. 학창시절부터 남들 앞에서 만담을 펼치는 것을 좋아해 연극을 통해서도 남들한테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대학에 입학하고 보니까 배우와 감독의 역할이 철저히 구분되어 있더라. 그래서 내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연출자가 되는 게 더 낫지 않나 싶었다.”
 
 연기보단 직접 연출한 결과물을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그에게 학부시절이 연출의 내공을 쌓는 과정이었다면 방송국 입사는 쌓아온 내공을 펼칠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어렸을 적 이야기꾼으로서 보이던 소질이 그의 현직 연출작을 통해 반영되기도 했다. 특히 드라마 <전설의 고향>은 그의 천재성이 가장 극명하게 반영된 작품 중 하나였다.
-<전설의 고향>을 어떻게 연출하게 됐나.
“처음 드라마 제작국에서 <전설의 고향> 촬영을 크게 반대했었다. 당시에 특수효과를 구현할 기술이 열악했을 뿐더러 스턴트업체마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전설의 고향> 촬영을 강력하게 주장해서 겨우 촬영에 돌입했다.” 
-당시 작품을 촬영할 때 중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전설의 고향>을 연출할 때 가장 한국적인 정서로 시청자들에게 다가가고자 했다. 아무래도 사람들의 죽음을 다루는 작품이다 보니 죽음을 어떻게 형상화하느냐가 가장 큰 관건이었다. 그래서 매주 어떤 이야기와 캐릭터를 다룰지 정말 많이 고민했다.”
-고민 끝에 나온 결과는 무엇이었나.
“가장 한국적인 죽음을 형상화하면 사람들이 공포심을 느끼면서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생각으로 공포심을 유발할 수 있는 소재는 구미호와 저승사자가 제격이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구미호와 저승사자는 한국 영상물에서 거의 나타난 적이 없던 소재였다. 그런데 한국인의 의식 속에 죽음을 떠올릴 수 있는 건 검은색 배경이 아닌가. 그래서 검은 도포에 검은 갓을 쓴 저승사자를 만들어 더욱 무서운 캐릭터를 형상화하였다. 지금까지 구미호와 저승사자 캐릭터가 드라마에 나오는 것을 보면 왜 저작권신청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한다.(웃음)”
-결국엔 범국민적 인기몰이에 성공했다.
“당시 시청률 조사기관이 따로 없었지만 방송국 지인들에 따르면 당시 대한민국 거의 모든 남녀노소가 <전설의 고향>을 봤다고 한다. <전설의 고향>이 한창 인기 있을 때 고등학교 담임선생님한테서 먼저 연락까지 왔던 기억이 난다.(웃음)”
 
 <전설의 고향>이란 한국형 판타지물을 연출하며 스타PD 반열에 오르지만 그 이후 그는 일반 소시민들의 애환과 현실을 담은 작품을 연출하는데 주력한다. 독재정권 시대에 작품을 통해 현실적인 사회상까지 그려내려다 보니 그에 따른 탈도 뒤따랐다.
-<전설의 고향> 이후 연출의 방향이 다소 바뀌었다.
“<전설의 고향>이 첫 출세작이었다면 나를 좀 더 유명하게 한 작품이 <보통 사람들>이다. 그 드라마를 통해 국민들이 정서적으로 굉장히 불안해했던 전두환 정권 시절에 소시민들의 애환과 정서를 담아내면서 국민들에게 안도감을 심어줬던 것 같다. 종영을 하려해도 끝내지 말라는 시청자들의 항의가 빗발쳐서 3년이나 방영을 했던 일일연속극이다. 종영할 땐 역대 최장수 일일연속극이란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소시민을 넘어 당대 정치현실을 그린 드라마도 연출했다.
“현장에서 연출을 하면서 열정을 가장 많이 기울였던 작품이 <욕망의 문>이다. 당대 대한민국의 정치현실을 풍자하는 작품이었는데 전두환 정권 시절이다 보니 정상적으로 방영되지 못했다. 심지어 방송에 내보내기 전에 정부 관계자들이 강제로 편집까지 관여하기도 했다. 방송 수위가 다소 위험했었는지 당시 중앙정보부에게 끌려갈 뻔 하기도 했다. 
-안타까웠을 것 같다.
“피땀을 흘려 연출한 작품이 검열당한 채 상처투성이로 방영되니까 연출자인 나는 당연히 상처를 받게 되더라. 기대한 만큼의 시청률도 나오지 못하니까 섭섭하기도 했다.”
 
 성공했던 만큼 좌절한 순간도 많았지만 양질의 드라마를 연출해야 한다는 최상식 동문의 신념은 굽혀지지 않았다. 단순한 멜로보다는 소시민의 삶을 그려내려고 했던 드라마를 향한 신념은 그를 KBS 드라마 제작국 국장까지 역임하게 했던 원동력이었다.
-연출현장을 떠나면서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내가 현장에서 마지막으로 연출한 작품이 <춘향전>이었다. 마지막 연출작인 만큼 캐스팅에도 더욱 더 신경을 썼다. 당시 <춘향전>의 배우로 캐스팅한 배우가 성춘향 역에 김희선 씨와 이몽룡 역에 이민우 씨였다. 두 신인들을 시청자들에게 처음으로 선보이며 가장 원작다운 <춘향전>을 구현하는데 힘썼다. <춘향전>을 마지막으로 드라마 제작국 주간을 거쳐 국장 자리에 오르게 됐다.”
-주간과 국장의 차이는 무엇인가.
“제작국 주간은 KBS드라마 기획에는 참여하지만 행정업무를 담당하진 않는다. 그러다가 1996년도부터 드라마 제작국장을 역임하면서 본격적으로 KBS에서 방영하는 드라마들을 총괄적으로 기획하게 됨과 동시에 행정업무도 맡게 됐다. 뿐만 아니라 방송작가와 탤런트들을 양성하는 것까지 국장의 업무다.”
-신경을 쓸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겠다.
“아무래도 제일 신경이 쓰인 건 시청률이었다. 방송국은 드라마의 시청률이 낮으면 방송국 프로그램 전체의 시청률까지 떨어지는 정도였다. 그런데 내가 드라마 국장이 됐을 때 KBS드라마가 제일 암흑기였던 시절이었다.”
-암흑기라니.
“KBS드라마가 상대적으로 타 방송국의 드라마에 비해 시청률이 주춤했던 시절이었다. 90년대 초반에 MBC가 <질투>라는 드라마를 시작으로 현대적인 감각을 살린 트렌디 드라마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후에 MBC가 <마지막 승부>라는 작품까지 대흥행시키면서 MBC가 드라마 왕국으로 불릴 만큼 위엄이 대단했다. 아름다운 영상과 배경음악 그리고 젊은 청춘스타들을 내세워 세련미를 살린 게 MBC드라마의 특징이었다.”
-국장으로서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을 텐데.
“사실 KBS가 MBC에 비해선 트렌디 드라마를 연출할 역량은 부족했다. 그래도 KBS가 심오한 주제의 드라마는 잘 연출했던 것 같아서 어설프게 트렌디 드라마를 표방할 바에 KBS드라마만이 자신 있던 복고적인 매력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KBS만의 매력을 살리려는 노력 끝에 탄생한 드라마가 <첫사랑>이다.”
-국장 시절 최고의 기획물이었다.
“직접 연출한 드라마는 아니지만 그래도 국장 시절 최고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빈부의 차이로 고민하는 두 남녀의 사랑을 그려낸 작품이었는데 정말 많은 시청자들이 사랑해주셨다. 지금도 절대 깨지지 않는 65.8%라는 역대 최고의 드라마 시청률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국장으로서 기쁘기 그지없었다.(웃음)”
-성공 뒤에 아픔도 찾아왔다.
“<첫사랑>이 1997년도에 종영하고 몇 달 뒤에 간암에 걸렸다. <첫사랑>이란 작품으로 병이 잉태되었던 것 같다.(웃음) 암수술을 받은 이후에 건강이 악화되면서 2002년도에 <겨울연가>를 끝으로 국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때마침 중앙대에서 교수직 제의가 들어와 은퇴 이후 지금까지 교육자의 삶을 살아왔다.”
 
 현직에서 은퇴했지만 30여 년간 드라마 제작에 힘쓴 만큼 최상식 동문은 지금도 한국 드라마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최근 한류와 막장에 편승해 흘러가는 한국 드라마의 기형적인 방향에 대해 그는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최근 드라마들에 대한 생각이 꽤 확고하다.
“소재는 굉장히 다양해졌지만 내용이 너무 퇴폐적으로 변해버렸다. 솔직히 근 몇 년간 방영했던 막장드라마들을 보면 불쾌하기까지 했다. 모든 드라마가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 한국 드라마의 이런 현상이 한류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한류로 인해 한탕주의가 팽배해지고 드라마 구조가 기형적으로 변해가면서 내용도 기형적으로 변해갔다. 사실 더 우려스러운 건 드라마의 수익 분배 현실이다.”
-수익분배 구조도 기형적이란 말인가.
“물론 자본력은 뒤지지만 과거의 드라마 제작환경이 지금보다는 훨씬 나았던 것 같다. 제작물 방송을 통해 남은 이익들이 그래도 배우, 감독, 작가, 스텝들에게 골고루 분배가 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드라마를 제작하면 스텝은 물론이며 제작자들은 거의 돈을 벌지 못한다. 한류 때문에 배우들의 인기가 너무 많아지면서 수익이 배우와 작가에게 편중되게 된 것이다.”
-지금의 드라마 제작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류로 인해 한국 드라마들이 국제적으로 굉장한 사랑을 받고 있다. <겨울연가>를 기점으로 우리 드라마가 이렇게까지 사랑을 받는구나하고 당황할 정도다. 그렇다면 한국의 드라마 제작자들은 이런 기대감에 부응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 되는데 그 이후로 한탕주의로 드라마의 내용이 더 막장을 달리고 있다. 드라마 연출자들이 양질의 드라마 제작을 위해 힘써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후배들이 어떤 연출가로 성장했으면 하는가.
“연출가란 사람들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잊혀진 진리들을 발견하여 영상물을 통해 그 진리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게 그들의 진정한 역할이다.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진리를 주제로 담아, 자신만의 방식으로 좋은 드라마를 만들어주는 후배들이 많이 나타나줬으면 한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어렸을 적 어머니가 나를 길러주시고 양육해주셨다면 중앙대는 내 드라마 창작의 원천이 된 고마운 존재다. 중앙대를 정말로 사랑했고 지금도 그 사랑에는 변함이 없다. 중앙대가 삶의 지혜와 지식을 배울 수 있었던 인생의 가장 큰 원천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원천은 내가 평생 드라마를 창작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이 되었다.”
 
 
<소공자>, 1975년 
<전설의 고향>, 1977년 
<보통 사람들>, 1982년 
<사랑하는 사람들>, 1984년 
<고향>, 1985년 
<해돋는 언덕>, 1985년 
<원효대사>, 1986년
<욕망의 문>, 1987년
<사랑의 기쁨>, 1988년
<삼국기>, 1990년
<춘향전>, 1994년
 
■주간 및 국장시절 주요 기획작품
<딸 부잣집>, 1994년
<남자 만들기>, 1995년
<젊은이의 양지>, 1995년
<용의 눈물>, 1996년
<첫사랑>, 1997년
<태조왕건>, 2000년
<가을동화>,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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