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수궁의 중화전이 조명을 받아 도심의 밤을 밝히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 박가현 기자


 근현대사에 있어서 덕수궁은 대한제국 시절의 한이 서린 곳이다. 현재의 덕수궁은 복잡하고 시끄러운 도심 속에서 관광객들로 붐비는 관광 명소가 됐다. 하지만 밤의 덕수궁은 현란하게 빛나는 빌딩숲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현대인들의 고요한 도피처가 되어준다. 어둠이 깔린 덕수궁과 국립현대미술관 ‘명화를 만나다 한국근현대회화100선’ 전시회에서 근현대의 서울을 느꼈다.
 

빌딩숲 한 가운데

시간이 멈춘 덕수궁,

근현대를 품다

 

 따로 야간개장 기간이 정해져 있는 다른 궁궐과는 달리 덕수궁은 오후 9시까지 개방된다. 야간개장 기간 동안 수많은 인파가 모이는 경복궁보다 한산하고 여유롭다. 야간에는 궁 안내 책자가 제공되지 않는다. 일이 모두 끝나고 휴식이 허용되는 밤이 왔으니 낮의 고뇌는 잊고 함께 온 사람과의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겠다. 
 

 덕수궁은 선조가 임진왜란 때 피난처에서 돌아와 급히 자리 잡으면서 궁궐이 되었다. 그래서 현존하는 조선의 궁 중 가장 작은 규모인 데다 전각들도 정연하게 세워지지 못했다. 아픈 역사가 담긴 궁이어서일까. 전쟁의 상처를 어둠속에 숨긴 덕수궁은 조선 왕실의 고고함과 화려한 모습만 조명 밖으로 드러내고 있다.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을 지나 중화문의 문턱을 넘으면 중화전이 덕수궁 한가운데를 지키고 서있다. 조명을 받은 중화전의 단청과 창살은 조선 궁궐 특유의 온화한 빛을 내뿜는다. 반면 궁궐 깊숙한 곳에서 서있는 전각 사이사이를 걷고 있으면 사극에서 몰래 사랑을 키우는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덕수궁은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나와 환궁한 궁궐이기도 하다. 덕수궁에 서양식 건물들이 많은 이유다. 각 전각들의 이름은 지극히 한국적인 반면 모습은 그리스·로마신화에서 나올 법하다. 여타 조선의 궁궐과는 달리 덕수궁만의 색채가 드러난다. 중화전 옆을 지키고 서있는 국립현대미술관과 석조전은 아테네 신전을 옮겨놓은 듯한 모습이다. 현대미술관 앞에 서면 서울의 빌딩숲과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 전통식 건물인 중화전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시공간을 넘나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덕수궁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옥색과 황금색으로 빛나는 정관헌은 요즘 말로 하면 고종이 애용하던 카페다. 서울에서 가장 분위기가 좋다는 삼청동 카페도 이에 비할 바는 못된다. 규모는 작지만 덕수궁에서 가장 화려하게 빛나는 밤의 여왕이 바로 정관헌이다. 
 

 ‘명화를 만나다 한국근현대회화100선’
 그렇다면 근현대 궁궐 밖의 삶은 어땠을까.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이번달 30일까지 ‘명화를 만나다 한국근현대회화100선’ 전시가 열린다. 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활동했던 57명의 화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작품마다 화가의 개성과 근현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베어있다. 


 

 

 멀지 않은 과거의 그림이어서일까. 그림들을 마주한 노년의 관객들은 쉽게 그 앞을 떠나지 못한다. 그들은 두툼한 코트에 구두를 신고 서 있지만 과거의 그림 앞에서 가난하고 어렵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빨래터에 쪼그려 앉아 빨래하는 어머니, 모기장 안에 누워 있는 아이들 모두 작은 캔버스 안에 담긴 과거의 모습이다. 특히 김환기 작가의 「피난열차」는 엽서 크기의 작은 그림이지만 노년 관객들 발길을 가장 오래 붙잡는 그림이다. 콩나물 시루처럼 열차 칸에 가득 찬 피난민들은 전쟁통의 혼란스러움을 잘 보여준다. 
 

 엄마 손을 붙잡고 따라온 아이들은 교과서에서만 보던 이중섭 작가의 작품 「소」가 가장 반갑다. 이번 전시에는 국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소」 세 점이 모였다. 세 마리의 소가 모인 것은 42년 만이다. 소의 크고 까만 눈에서 전쟁 통에 가족과 이별하고 살아갔던 작가의 집념과 연민이 묻어나온다.
 

 “이 작품은 소리를 눈으로 듣는 작가의 그림입니다. 그림 안에서 한국의 소리가 들리시나요?” 도슨트의 질문에 관객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바로 김기창의 「아악의 리듬」이다. 빨간 두루마기를 걸친 악사의 강한 선과 색감이 노래가 되어 귀로 흘러들어온다.
 

 이 날 전시 설명을 맡았던 도슨트 김혜정씨는 “그림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작품의 기법, 특징을 모두 이해할 필요는 없다”며 “근현대 미술은 기술적인 부분을 떠나서 함께 온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그림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작품 하나하나가 나의, 나의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정신없고 각박한 삶은 잠시 내려놓고 밤의 덕수궁과 현대미술관에서 마주하는 과거의 모습에서 위안을 얻어보는 것은 어떨까.   
 


 관람정보
 ■덕수궁  
 매표 및 입장시간 09:00 ~ 20:00
 퇴장시간 09:00 ~ 21:00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관 관람시간
 화, 수, 목요일 : 오전 10시 ~ 오후 7시
 금, 토, 일요일 : 오전 10시 ~ 오후 9시(야간개장)
 관람료 : 덕수궁 관람료 포함 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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