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녀가 있다. 마이클(이완 맥그리거)은 요리사고 수잔(에바 그린)은 과학자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은 식당에서의 첫 만남 후 사랑에 빠진다. 어느 날 도시에 낯선 전염병이 퍼진다. 감각을 마비시키는 바이러스를 지닌 전염병은 먼저 사람들의 미각을 없애버린다. 전염된 사람들은 새우튀김과 오므라이스와 소고기의 맛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음식을 먹는다. 잃어버린 미각은 후각으로 대체하면 되니까. 며칠 뒤 바이러스가 변형된다. 이번에는 후각이 사라진다. 미각과 후각이 사라졌지만 마이클의 식당은 망하지 않는다. 맛과 향에 대한 ‘기억’이 있으므로 손님들은 여전히 식당을 찾았다. 두 연인도 변함없이 사랑을 지속한다. 잃어버린 미각과 후각을 대체하려고 사람들은 이제 청각을 혹사시키기 시작한다. 나이트클럽이 호황을 맞이하고, 사람들은 헤드폰을 쓴 채 볼륨을 높인다. 그러나 바이러스는 빠르게 변형되고 마침내 청각마저 마비된다. TV에서 앵커는 수화로 뉴스를 전달하고 도시는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진다. 마이클과 수잔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감각이 상실되는 공포를 견딘다. 천천히 화면이 어둠에 깔리고 시각마저 사라졌다는 사실을 관객들이 인식하는 순간 영화는 끝난다. 점차 가중되던 공포와 불안이 절정에 달하면서. 
 
  어둠 속에서 마이클의 독백이 울린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 사랑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직 촉각이 남아 있다.” 데이빗 맥켄지 감독의 영화 <퍼펙트 센스>(2011)를 본 후, 한동안 ‘감각’이라는 화두를 곱씹었다. 그리고 한강의 소설 <희랍어 시간>(2011)을 읽었다. 이 소설에는 시력을 점차 잃어가는 남자와 실어증에 걸린 여자가 등장한다. 각기 시력과 언어를 잃어가는 두 사람의 사랑은 답답할 정도로 느리고, 신중하지만 애틋하다. 격렬한 대화나 성애 없이도 두 남녀는 서로를 서서히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2012년 1학기 강의에서 데이빗 맥켄지 감독의 영화와 한강의 소설을 가지고 글을 써보라는 과제를 냈다. 한 학생의 글이 유독 마음을 울렸다. 글은 이렇게 시작됐다. “나는 벙어리가 아니다. 청각장애인이 아니며 맹인도 아니다. 나는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아름다운 것들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영화와 소설을 그대로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학생은 ‘감각의 상실’을 자신의 삶과 연계시켰다. 그는 제대한 이후에 몰라볼 정도로 깔끔해진 학교에 놀라워하면서 기숙사에 들어갔지만 이내 외로워졌다고 한다. 예전의 기숙사와는 달리 옆방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축구를 하고 싶어도 사람을 모을 수가 없었다. 학생의 고백은 계속됐다. 입대 전에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즐겼던 청룡호수는 훨씬 작아졌고, 나무들이 잘려나가고 탁 트인 호수 근처에 이제 사람들은 머물지 않았다. 잔디밭은 깔끔했지만 텅 빈 공간에 불과했고, 군대에 있는 동안 여자친구가 속했던 학과는 사라졌다. 룸메이트들과 친해지고 싶었지만 다들 각자의 일에 바빠서 친분을 쌓을 수가 없었고 그는 어떤 상실감에 젖은 채 한 학기를 보냈다고 한다. 글은 이런 선언으로 끝났다. “영화나 소설의 설정과는 달리 내가 정작 잃어가는 감각은 시력이나 청각, 후각이 아니라 바로 ‘친밀감’이었다.” 그는 외로운 시간을 관통하면서 새로운 감각을 찾았다. 그 글을 읽는 동안 나는 그 학생의 가장 열등한 제자였다. 
 
  학부 시절 친구들과 이런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어떤 규칙을 무조건 지키면서 하루를 보내기.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24시간 동안 말을 하지 말 것. 24시간 동안 귀를 막고 지낼 것. 혹은 24시간 동안 코를 막고 호흡하며 음식을 먹지 말 것. 실연으로 생성된 결핍을 견디기 위한 치기에서 시작된 실험이었지만 효과는 놀라웠다. 입을 닫자 귀가 예민해졌고, 귀를 닫자 흥미진진한 영화나 드라마의 장면들이 우스꽝스러운 풍경으로 전락했고 활자가 들어왔다. 하나의 감각이 차단되자 다른 감각은 예민해졌다. 이 세계를 감각의 과잉과 결핍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문학 텍스트 내부의 인물들이 유용한 증인이었다. 그들은 고통을 견디면서 꿈을 꿨고, 사랑을 잃은 후에 자기 자신을 파괴했다. 또한 어른들의 타락을 배우지 않기 위해 성장을 포기하는가 하면 동의할 수 없는 현실을 환상으로 치환시켰다. 그들은 모두 어딘가 병들어 있었고, 어떤 감각을 상실하며 앓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이 세계에 대한 적실한 은유였다. 
 
  과잉이 욕망의 발현이라면, 결핍은 욕망의 산파다. 우리의 모든 감각이 욕망 충족의 수단으로 전락한다면 그것은 예정된 파국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불안과 공포는 감각을 차단시키고 과잉과 결핍의 악순환으로 우리를 떠민다.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경쟁과 생존을 강조하면서 자기계발을 요구하는 이 세계의 정언명령들과 싸워야 한다. 불안과 공포를 이용하여 감각을 마비시키고 상호간의 친밀감을 해체시키는 것이야말로 체계가 우리를 지배하는 방식이다. 친밀감은 불안과 공포를 이기고 감각을 해방시키는 유일한 힘이다. 감각을 잃어가면서도 서로를 포기하지 않았던, 영화와 소설 속의 연인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이정현 문학평론가
국문과 박사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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