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고전'. 사진 박가현 기자
 
  서라벌예술대학 출신 시인 신중신의 첫 시집 제목이 ‘고전과 생모래의 고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희성 시인의 신춘문예 당선작 「변신」은 “고전의 어느 숲을 지나온 강물 위에 지금은 무섭도록 해진 얼굴이 일렁이는데”로 시작된다. 송기원의 신춘문예 당선작 「회복기의 노래」에도 “바람의 부드러운 촉루 하나에도 돌아온 사자(死者)들의 반짝이는 고전을 보았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땅의 문인들은 고전을 읽으며 문학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지금은? 도무지 고전을 읽지 않는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 높이 평가되었고 애호된 작품을.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한자성어는 옛것에서 배워 새로운 것을 깨닫는다는 뜻이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은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이다. 우리 조상은 공자왈 맹자왈 하며 공리공담만 일삼았던 것이 아니라 경전 공부를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학문을 깨우치고 열어갔다. 역사를 모르고서 미래를 설계할 수 없는 것처럼 기초를 다지지 않고 신학문을 개척할 수 없는 법이다. 
 
  도서관에서 방학을 나는 학생들이 있다. 보고서 작성과 시험 준비로 읽고 싶은 책을 학기중에 못 읽던 학생들이 방학 때 독서 계획을 짜놓고 집중적으로 읽으며 수십 권 책을 독파하는 학생들이 등단을 하여 문인의 길을 걸어간다. 아무리 시대가 디지털의 시대요 정보전쟁의 시대라지만 고전을 읽지 않고 학문을 했다고 할 수 없다. 나는 문예창작전공이니 문학에 국한시켜 고전문학론을 펴본다.
 
  대학 시절, 서정주 선생은 방학을 앞두고 영어 공부를 할 학생은 성경을 영어판으로 읽도록 하고, 이 공부가 내키지 않으면 『삼국유사』를 독파하라고 권유하셨다. 나는 후자를 읽은 연후 수십 편의 시를 쓸 수 있었다. 우리 정신과 정서와 상상력의 보물창고라고 하신 말씀은 진리였다. 김동리 선생은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등 그리스 비극 작가의 작품과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읽어야만 서양문학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옳은 말씀이었다. 
 
  서양에서 소설, 특히 장편소설의 역사를 알려면 선구자 역할을 했던 스탕달과 발자크의 소설을 읽어야 한다. 장편소설을 읽을 지식과 시간, 경제적 여유를 가진 계급은 영국 산업혁명 이후 중산층의 등장과 프랑스대혁명 이후 시민계급이 대두되어서야 가능했다. 우리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경제적 여건이 허락되어서야 소설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고전주의는 극, 낭만주의는 시, 사실주의는 소설이 대표 장르임을 작품을 읽지 않고 알 수 없다. 스탕달과 발자크와 졸라의 소설은 모두 왕족과 귀족의 몰락과 서민의 신분 상승을 다루고 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함께 발달하면서 서민과 하층민이 참정권을 가진 시민이 되는 과정을 이들의 소설은 말해주고 있다.
 
  카뮈의 「이방인」과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지 않고 실존주의를 논할 수 없다. 실존주의가 우리나라 전후문학에 끼친 영향 또한 논할 수 없다. 독일 표현주의를 알려면 고트프리트 벤과 게오르크 트라클의 시집을 읽어야 하며, 카프카의 소설을 읽어야 한다. 톨라와 카이저의 희곡을 읽어야 라인하르트와 피스카토르를 거쳐 브레히트와 유진 오닐로 이어지는 계보를 그릴 수 있다. 다 문학사의 고전들이다.
 
  한국소설의 양대 산맥 김동리와 황순원의 소설을 읽지 않고 소설가가 되려는 생각이 옳은 생각일까? 오장환과 이용악의 시를 아직 모른다면 읽어보아야 한다. 읽어보면 감동할 것이다. 
 
  세계문학사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 찾아보면 나올 텐데, 이런 내용이 있었다. 영국의 문학사가(文學史家)가 찰스 디킨즈와 브론테 자매를 최고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번역된 톨스토이의 소설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전쟁과 평화』, 『안나카레리나』, 『부활』을 보니 스케일이 달랐던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를 수 없는 소설의 최고봉이라 생각하고는 ‘소설의 황제’라는 칭호를 붙여야 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기 시작하자 생각이 바뀌었다.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며 K2를 정복하자 더 큰 산이 있는 것을 보고 그는 경악하였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소설의 신’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들의 소설을 읽지 않고 어찌 소설을 읽었다고 할 수 있으랴. 
 
  시도 마찬가지다. 당나라의 이백과 두보가 왜 ‘詩仙’과 ‘詩聖’으로 불리는지 작품을 보아야 알 것이 아닌가. 굴원과 트라클과 예세닌과 하트 크레인, 실비아 플라스가 왜 자살했을까? 로르카가 스페인내란 발발 시에 왜 처형당했을까? 순수서정시를 쓰던 하이네가 왜 현실참여시인으로 돌변하는지, 초현실주의 시를 쓰던 폴 엘뤼아르가 왜 저항시를 쓰게 되었을까? 프리드리히 휄덜린이 왜 정신이상자가 되었을까, 왜 정신이상자의 상태로 36년을 살아가게 되었을까? 
 
  대학생들이여, 고전을 읽자! 고전은 지금 당장에는 도움이 안 될지라도 우리의 삶의 밝혀줄 등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도서관에서 퇴색되고 있는 동서고금의 고전에 학생들의 손길이 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승하 교수
공연영상창작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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