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지 않은 두 남녀가 근사한 식당에서 맞선을 본다. 서른이 넘은 남자는 맞선에서 남자가 해선 안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지만 기어코 입을 연다. “쇠고기 일 킬로그램에 곡물 구 킬로그램이 들어가거든요. (…) 선진국이니 뭐니 좀 산다는 나라에서는 그 사람들이 먹을 곡물을 소한테 먹여서 경제적으로 보면 구분의 일, 십일 퍼센트짜리의 형편없는 결과물을 얻은게 쇠고기란 말이죠.”
 
  서양식 코스가 나오면서 남자의 생태주의적 설교는 목축에서 새우 양식으로, 소젖 강탈을 넘어 여자가 바르는 립밤까지 이어진다. 그나마 간간히 미소를 보이던 여자는 대화가 중반이 넘어가자 흥미를 잃더니 사라진 남자를 향해 한마디 내뱉는다. “됐다 새끼야, 제발 그만 좀 해라.”  
 
  설교와 무관심의 무한한 순환으로 이어진 이 책의 서사는 “작가 성석제의 표준적인 감각”(서영채)을 보여준다. 삶의 일상적인 부분에서 말하고자 하는 자는 ‘계몽적이거나’ 적어도 ‘수직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누군가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상황에서 그 누군가는 알지 못하는 자에게 훈계하듯 말하게 된다. 이 혐의는 비단 외부를 향한 날선 비판이 아니라 작가 성석제 자신을 향한 자책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발언하는 구라꾼이 ‘말’을 의심한다는 것. 성석제의 본령은 바로 이 의심에 있다. 성석제 소설이 보여주는 특유의 능청과 너스레는 비록 ‘웃음’이지만 한국 소설에 만연한 날선 웃음이라거나 값싼 웃음과는 거리가 있다. 다 알고 있으니 크게 웃어나 보자는 식의 웃음이 성석제 소설을 관통하는 미학이다. 건강하다고 말할 수만은 없지만 매력적인 웃음이 일곱 번 변화하며 남긴 흔적이 이 책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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