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비평>


청년들에게 강요되는 성공이라는 신화에 대하여

장수민 학생(불어불문학과 4)

1부
아픔이라는 대명사.

 

1.

번년도에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기 전,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혼자 이곳저곳 쏘아 다니며 고생도 많이 했지만 마음만큼은 최대한 편안하게 그곳에 나를 녹이는 즐거운 시간들 이었다. 여행이 의미가 있다는 것은 나에게 주어져 있던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을 찾아 나서는 과정 속에서 일상가운데 당연하게 알고 있던 것들이 결코 당연하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사람들은 '넓은 시야'를 갖는다고 표현하는 것이리라. 다른 나라에서 만난 새로운 자극들은 나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진 상황과 환경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던지도록 만들었다.

 

나는 1,2년 전부터 평소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단순히 무시하지 않고 기록하는 습관을 들여왔다. 그래서 개인 홈페이지에 정리되지 않은 글 솜씨로 이것저것 소모적인 생각이나 논쟁의 여지가 있는 생각들을 거리낌 없이 올려둔다. 그 중에 여행 다녀와서 쓴 이런 글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느낀 사람들의 직업관은 어떤 일을 하든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행복하게 하는모습이었다.(대체적으로) 반면 한국의 사회는 청년들에게 리더십을 굉장히 강조한다. 미디어 에서는 연신 최고의 성적을 거둔, 혹은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을 방송해주고 따로 관심이 없다면 우리는 이들의 세상만을 보게 된다. 뭔가 앞서나가지 않으면 도태되는 듯한 박탈감은 여기에서 오는듯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두가 리더가 될 수는 없다. 이끌고자 하는 대상이 있어야 이끄는 사람이 있는게 아닌가. 리더가 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걸까. 내가 꼭 그 자리에서 최고 실력자가 되어야 하는 걸까. 내게 주어진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방법을 어쩌면 우리 청년들은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한국 사회여, 더 이상 우리에게 리더가 되기를 강요하지 말라.

 

여행을 다녀온 당시에 쓴 것이긴 하지만, 평소에도 나는 '리더십'이라는 글자가 두렵고 싫었다. 비교적 정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의 나에게 '리더십'이라는 것은 주류를 의미하고, 적극성을 의미하며, 외향성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글로벌 리더십'이라는 과목이 필수적으로 수강해야하는 과목으로 개설되어있을 정도로 리더십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이 100명이 있다면, 성격과 성향도 100가지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또한 리더십이란 개인의 자질로서 그것이 도덕성처럼 인간이 필수적으로 지녀야 할 절대적인 덕목도 아니다. 그러나 '리더십'이라는 것은 모두가 가져야 할 필수적인 능력이 되어, 그 능력이 부족한 자에게 박탈감과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

 

이에 대한 생각을 이어나가다 보니, 나는 '리더십'이라는 글자 뒤에 '성공'이라는 단어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시대 가운데 사회로 진출해야하는 대학생들, 혹은 젊은 청춘들에게 리더십이란 앞으로 있을 '성공'을 위해 요구되는 개인의 자질인 것이다. 이렇게 나는 '리더십'이라는 단어에서 벗어나 '성공'이라는게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2.

점에 들어가면 수많은 자기 계발서들이 즐비하게 드러누워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자기계발서를 기피한다. 예전에는 한때 이러한 자기 계발서들을 좋은 참고 자료로 사용하며 공부에 이용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적용엔 한계가 있고 여러 권을 펼쳐들어 보다보면 결국엔 다 비슷한 논지로 이야기가 마무리 된다. 그리고 그 책의 저자들이 얼마나 성공적인 삶을 살았기에 이것들이 마치 너무 쉬운 것처럼 말하는가 싶어 나에게 자기 계발서들은 증명 없는 약속의 남발이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그 비슷한 논지라는 것이 결국은 '성공'과 그 비법에 대한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우리 국민의, 특히 취업이라는 중대사를 앞두고 있는 청춘들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성공'이며, 이것은 인생의 표지이자 목적 역할을 한다. 가끔 그 목적으로 향하는 길이 멀고 어렵게 느껴질 때 자기 계발서와 같은 책을 참고로 하여 지도를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자기계발서와 그 것에서 말하는 성공이 모두 기만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여지껏 성공한 사람들이 '자기 계발서'한권으로 자신의 성공이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또한 이른바 그것을 쓴 '성공한 저자'들이 성공에 대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노력만 하면 자기 것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성공'이라는 것이 소수에게만 허락된 것임을 알고 있다.

 

3.

즘 청년들에게 정신적인 멘토가 필요한 것은 성공 위주의 사회에서 겪게 되는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함 일 것이다. 최근 청년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유명한 책이 있는데, 바로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이어서 출간 된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라는 이 시대의 멘토라고 칭해지는 김난도씨의 책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수많은 청년들이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었다는 것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책의 목적 역시 그러했으리라. 그러나 나는 이 책의 또 다른 일면을 보게 되었다. 저자의 의도가 어찌 되었든 간에 책이 유명세를 타면서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의 제목이 유행어처럼 이곳저곳에서 쓰이게 되었는데, 그것으로 인해 청춘은 당연히 아픈 것이다라는 논리가 사회저변에 퍼진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기업들이 청년을 지배하는 도구로서 사용되고 있다. 사회의 지배자 층은 성공이라는 먼 미래를 담보로 청년들에게 낮은 임금, 높은 근무시간, 육체적·정신적인 소비라는 '아픔'을 희생하도록 한다. 아픔이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린 청춘들은 한 차원 더 깊이 아파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아픔에 대해 사회를 향해 외치는 소리는 ' 청춘이라는 게 원래 아픈 거야.' 라는 기성세대들의 한마디로 묵살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청춘만 아픈 게 아니라는 것을, 동일한 종류의 아픔이 우리의 모든 삶에 편재하고 있다는 것을. 이것은 누구의, 무엇을 향한 기만일까.

2부 

성공이라는 신화. 

1.

공이라는 것에 대해 자세히 생각 해 본 적이 있는가? 일반적으로 '성공'을 말할 때 우리에게 상기되는 이미지들이 있다. 그것은 경제적인 가치가 대부분 우선시 되어있고,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가 혹은 유명한가 와 같은 구분들로 구체화 된다. 이러한 이미지는 많은 광고에서도 사용 되는데, 보통 사회에서 성공한 운동선수나 유명세를 탄 배우, 사업가 들이 그 제품을 사용한다며 사용을 권하거나 간접적인 이미지 제시를 통해 소비자를 유혹한다. 혹은 넓은 개인 사무실 밖으로 보이는 고층빌딩, 그리고 그 안에 고급 수트를 입은 캐릭터를 등장시키는데, 이것은 짧은 광고시간동안 이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대표적인 이미지를 통해 제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이라는 것은 여러 대중 매체들을 통해서 동일하게 이미지화 되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성공'이라는 것이 대표적인 이미지를 가질 수 잇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성공은 어떤 한 관념일 뿐이다. 관념은 형체가 없다. 그런데 '성공'이라는 두 글자는 마치 형체를 가진 어떠한 것처럼 우리에게 추구되고 있다. 또한 삶의 전체적인 측면에서 '성공'을 본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성공을 갈망하게 되는데, 이것은 자신의 현재를 지우는 행위이다. 성공을 갈망하는 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행복을 미래로 유보한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자식들의 좋은 성적, 더 높은 직급. 이렇게 더 높은 목표를 추구하며 현재보다는 미래의 기쁨을 바라보는 것이다. 현재의 기쁨을 미래에게 양보하는 이러한 삶의 태도는 현재를 계속 아프게 만든다. 지금 미리 아픔을 겪으면 나중에는 웃는 날만 있을 거라는 생각은 동화적인 발상이 아닐까.

 

2.

금의 제국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그곳에서 등장하는 주인공 장태주는 판자촌에서 리어카를 끄는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자신의 노력으로 성진그룹이라는 대기업의 일원이 되는 데에 성공한 인물이다. 이 사람은 누가보아도 성공한 사람, 성공한 기업가이다. 그러나 그에게 존재 하는 것은 증오와 미움뿐이다. 그는 성진 그룹의 한 가운데에 들어가, 사회에서 존경받고 부러움을 사는 성진그룹 가족들의 기만적인, 그리고 권력 앞에서 너무나 비굴하게 변하는 그들의 실태를 모두 목격 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마을에요, 숲속에 괴물이 살았습니다. 아무도 본 적이 없습니다. 두려웠죠. 매년 처녀를 제물로 바치고 풍년이 들면 소를 잡아서 제사도 지냈습니다. 근데요, 선배, 나 숲속에 들어가서 그 괴물을 봤습니다. 성진그룹 회장 최원재, 대한민국 경제를 움직이는 10인중 1, 전 압니다. 최원재가 어떤 사람인지.(회상장면) 성진그룹의 큰 딸 최정윤. 공식행사에서 그녀가 입은 옷하고 가방에, 신문기사 1면에 오르는 대한민국 여자들의 로망. 전 압니다. 최정윤이 어떤 사람인지.(회상장면) 성진그룹 며느리 박은정, 백화점을 경영하는 유능한 여성 ceo... 말해줄까요? 어떤 사람인지? (회상) 성진그룹 사위 손동휘...(중략) 그들은 숲속의 괴물이 아니라, 벌레입니다. 숲 속에 숨어서 우리의 두려움을 즐기는, 벌레. (드라마 황금의 제국’ 21회 중)

 

이러한 장태주의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성공'이라는 것이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성진그룹과 장태주의 '성공'은 대중들에게 너무도 절대적으로 보인다. 그들은 누가 보아도 경제의 지배구조 꼭대기에 있는 성공한 삶을 사는 인간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삶에는 따듯함과 행복함이 없다. 오로지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거나 더 높이 오르기 위해 살아간다. 그런데 '행복'이 없는 성공 이라는 게 가능할까? 장태주는 이들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괴물일 지라도 그들의 실체는 벌레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권력 앞에서 그들의 나약함을 본 자의 증언이다. 이 드라마에서 장태주 역시 그러한 성진그룹에서 살아남기 위해 불법과 비리, 비도덕적인 행위를 많이 한다. 그 속에서 장태주는 자신의 프로젝트나 계략이 성공해서 자신이 성진 그룹에서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때, 행복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더 큰 욕망을 향해 돌진한다. 그의 목표는 성진그룹의 회장 자리이다. 그 목표로 돌진하면서, 그는 자신에게 최소한의 행복을 허락했던 연인에 대한 사랑을 잃는다. 그리고 자신의 힘이 되어주었던 동료들을 버린다.

 

이 장태주의 삶을 과연, 성공했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일까. 도대체 성공이란 무엇일까. 너무나 모호한데, 이 성공은 물신화 되어 오늘날 모든 이들의 최대 목표, 삶의 목표가 되었다. 사회가 말하는 성공, 그것은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는 '신화'에 불과하다.

 

3.

회는 개인에게 성공하기를 강요한다. 마치 우리가 수험생일 때 어른들이 "3년만 딱 참고 공부해라. "라고 말하듯이 사회는 성공이라는 보상물을 약속하며 이 순간을 참고 견디라고 한다. 이러한 강요는 우리가 아주 세밀히 들여다봐야지만 보이는 그물망 같은 것인데, 우리가 성공을 원하여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추구할 때, 그것은 나의 의지가 아닌 단지 사회가 심어 놓은 틀에서 기인한 결과물뿐일 수도 있다.

 

내가 이것을 희미하게나마 느끼는 이유는 이렇다. 나 스스로 내가 성공한 이미지를 그려 보았을 때, 나의 모습은 대략 좋은 집에, 유명세를 타서 방송출연을 빈번히 하고 많은 사람의 멘토가 되어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내가 정말 그것을 원하는지를 생각 해 보았을 때, 나에게 집이란 그저 내가 자유롭게 장식할 수 있고 전세든 월세든 나의 경제적 상황에 어울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남 앞에 나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얼굴이 알려지고 싶지도 않다. , 나의 성공의 이미지는 나와는 너무 멀고, 내가 원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허황된 이미지는 어디서 온 것일까?

 

나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공저 '계몽의 변증법'문화산업: 대중기만으로서의 계몽"에서 이와 관련해서 많은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 생각과 선망의 대부분은 우리 일상의 결과물 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의 여가시간은 문화산업이 제공하는 획일적 생산물로 채워 질 수밖에 없다. 칸트의 도식이 감각의 다양성을 근본 개념과 연관시킬 수 있는 능력을 주체에게서 기대했다면 산업은 주체로부터 그러한 능력을 빼앗아 간다."(189p)

 

현대 사회의 대중문화는 모든 차이를 희석시키고 동질화 시키는 특징이 있다. 이것은 획일화를 가져온다. 동질화된 일상, 획일화 된 일상 가운데에서 주체들의 개별성은 사라지고 우리들의 성공에 대한 이미지도 동일해져 버린 것은 아닐까. 획일화 된다는 것은 개인의 차별성이 사라지면서 나의 자리를 누군가가 쉽게 대체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문화산업의 무서운 점은 위에 언급한 것처럼 모든 사람을 동질화 시켜 다른 사람에 의해 대체가 가능한 복제물로 만든다는 점에 있다. “하나의 개인으로서 각자는 절대적으로 대체가능한 존재로서 절대적인 무가 되는 것이다.”(221p) 나는 이런 교체 가능한 부품이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모던 타임즈의 노동자들처럼, 서태지의 노래 가사 속처럼 그저 포장센터에 넘겨져서 '대학이란 포장지로 멋지게 싸버려진상품은 아닐까?

 

내가 현대사회가 우리에게 성공을 강요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우리가 현대사회의 주요 담론의 한가운데에서 그것을 거부하거나 그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푸코가 말하는 권력의 미시물리학에도 잘 드러나 있다. 보이지 않지만 우리 삶에 편재하고 있는 권력에 의해 우리는 성공의 이데올로기를 강요받는다. 이 강요는 물리적인 방법이 아닌 굉장히 은밀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행해지는데, 예를 들어 지하철 내부에 곳곳이 붙어있는 안내 스티커, 화장실 내부에 있는 도전적인 글귀들은 단지 이용자의 편의뿐 아니라 이용자의 사고에도 보이지 않는 영향을 끼친다. 이 글귀를 통해 우리는 사회의 체제에 순응하게 되고 사회는 순종적인 피지배자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지하철에서 멍하니 서 있어도 자연스레 화살표가 향하는 방향으로 우리의 발걸음을 돌릴 수 있게 된다. 권력은 이렇게 은밀하게 우리의 생각을 비우고 나 자신이라는 주체를 지운다.

 

우리는 대학 계단, 화장실, 혹은 대학에서 보내는 문자, 이메일 등을 통해 '스펙','성공','취업'이라는 단어에 노출되어있다. 청년들에게 진정한 성공이란 스펙과 취업에 달려있는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 역시 여기에 나도 모르는 새에 물들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청년의 슬픈 현실이다.

 

5.

렇다면 우리가 사회가 강요하는 성공이데올로기에서 빠져 나오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그리 어려운 일일까? 내 생각엔 그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한번 전복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성공이데올로기에서 빠져 나온다고 해도 그 상태로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일상의 한가운데에서 다시 거기에 자연스레 물들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매 순간마다, 모든 삶의 현장에서의 싸움이 될 것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토크빌의 분석을 인용하며 문화가 독점하고 있는 현대 사회 내에서 주류 체제에서 벗어나는 인간이 어떻게 다루어지는지 이야기한다.

 

"폭군은 육체를 자유롭게 놓아두는 대신 곧바로 영혼을 공략한다. 지배자는 더 이상 '너는 나처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당할 것이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처럼 생각 하지 않는 것은 자유다. 너의 생명이건 재산이건 계속 네 것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 이후 너는 우리들 사이에서 이방인이 될 것이다'."

 

우리 주변에 편재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들은 우리를 이미 고분고분하게 순응시켜 놓았다. 결과만 좋으면 모든 게 용서가 된다는 결과지상주의는 이미 우리 삶에 만연하다. 그것이 설사 잘못 된 것이라고 생각을 하더라도, 생각만 할 뿐,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은 이미 그것을 따르고 있다. 권력에 의해 지배받는 피지배자들은 이데올로기의 생산자들이 부과하는 '성공'이라는 도덕을 지배자들보다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그것을 추구하는데,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피지배자들은 아무런 심적 동요 없이 매달린다. 성공은 피지배자들의 '소망'이고 그리스 신화의 판도라의 상자가 말해주듯, 이것은 인간을 삶이 계속 되도록 지탱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기만당한 대중은 성공한 사람들 보다 더 성공의 신화에 사로잡힌다. 만약, 우리가 성공이라는 거대 담론에서 제외 된다면, 우리는 소망을 박탈당하게 되고, 보이지 않는 권력은 그자를 이방인으로 만들 것이며, 그는 뿌리 내릴 곳조차 없이 떠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저항하는 자는 저항을 포기하고 자신을 어떤 부류(성공이데올로기)에 넣음으로써만 살아남을 수 있다.

 

3부

지금 여기에서.

1.

금까지 우리는 청춘의 아픔과 그 아픔의 원인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청춘이 아픈 원인은 보이지 않는 권력이 강요하는 '성공'의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성공의 이데올로기는 개인마다 그 의미와 기준이 다를 수밖에 없는 개별적인 관념인 '성공'이라는 것의 이미지를 동질화하여 그것을 마치 형태가 있는 물질, 따라서 모든 사람의 목표와 획득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처럼 대중을 기만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에 우리 일상 곳곳에서 주입되며, 새겨진다. 이것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그 사람은 이방인이 되고 삶의 소망을 박탈 당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권력은 별다른 노력 없이 손쉽게 저항을 시도 하는 자들을 진압하여 자기의 발 앞에 무릎을 꿇린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청춘들이 삶의 목표인 '성공'을 위하여 '아픈 것'은 당연한 것이 되었고, ‘아픈 것이 청년들의 정체성이 되었다. 권력이 피 지배자들을 자기 아래 두는 방법은 이렇게 교묘하게 원을 그리며 순환되고 있다. 청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아픔을 씻어주기 위해 쓰인 김난도씨의 책의 제목이 다시 한 번 청년들에게 족쇄를 채우는 것. 이것이 보이지 않는 권력의 무서운 능력이다.

 

2.

렇다면 청년들은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이 거대담론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 수 밖에 없는가? 아니다. 적어도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인지하여야 한다. 하이데거는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묘사하며, 일반적으로 통용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경계가 필요함을 말한다.

 

"여기에는 '스스로' 선택하지 않고 '그들' '사람들'이 하는 대로 살아감이 있다. 다시 말해 과거도 떠맡지 않고 자신의 본래적인 존재가능성을 미래로 던지지도 않으면서 '그들'이 살듯이 그저 그렇게 일상의 문법을 따르면서 거기에서 통용되는 인식의 틀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누군가는 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이 옳은 것이라고 말 할지도 모르겠다. 그게 당연한 거라고. 하지만 이 글을 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 할 것이다. "나는 저러지 않아야 하는데..." 이것이 문제 해결의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계몽의 변증법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즐긴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해 더 이상 생각 하지 않는 것, 고통을 목격 할 때조차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즐김의 근저에 있는 것은 무력감이다. 즐김은 사실 도피다. 그러나 그 도피는 일반적으로 얘기 되듯 잘못된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마지막 남은 저항의식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오락이 약속 해주고 있는 해방이란 '부정성'을 의미하는 사유로부터의 해방이다."

 

인생을 즐기기 위해 산다고 하는 것은 달콤하게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한 상태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우리 삶의 주인으로서 삶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 일상으로 도피해선 안된다. 우리에겐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닮은 나의 모습에 대해 저항해야할 책임이 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위와 같은 내용을 통해 '부정성의 사유'라는 개념을 착안했고, 저항의 의미를 내포하는 이 부정성의 사유가 우리 삶 가운데에서 지표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거시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이 거대담론에서 빠져 나갈 수 없다. 우리의 삶은 곧 굴러 떨어질 줄 알면서도 계속해서 돌을 굴려 올리는 시지프스의 고통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이름은 삶에 대한 책임이다. 성공이라는 거대담론에 대항하여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나를 수동적인 삶이 아닌 능동적인 삶으로 이끌 것이고, 옳지 않은 것에는 저항할 수 있는 정신을 허락할 것이다.

 

3.

공은 우리에게 미래를 약속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곳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이다. 우리가 사회가 제공하는 거대 담론으로서의 성공이 아닌, 개인적인 의미로서의 성공을 스스로 정의한다면, 우리는 더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얼마든지 지금 이 순간에서 성공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또한 어느덧 우리 생의 전 목표가 되어버린 '성공'에서 벗어나 내가 좋아하는 일이 나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만약 성공을 목표로 나의 직업을 찾는다면, 그 성공이라는 것은 영원히 나의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으로서 나의 우선순위를 '성공'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일' 에 둔다면 우리는 오지 않을 미래의 성공이 아닌 일상의 작고 연속적인 성공들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현재를 사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미래를 현재로 만들기 위해 그것을 바라봐야 할 때도 있다. '성공'이라는 것의 의미에 주체성을 부여해서 미래를 그려보자. 누구나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성공이 사회의 거대담론이 이미 부여해 놓은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이 주체적으로 형성한 개념일 때 그것은 사회에 저항하는 부정성의 사유로서 일상에 젖은 우리 삶에 경고를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관점에서 나의 30년 후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4.

찍 일어나 가족들을 깨운 뒤 준비한 아침식사를 식구들에게 대접한다. 내가 한 요리가 가족들을 기쁘게 해 주어서 나 역시 기쁘다. 식구들이 외출한 후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설거지를 한다. 정리를 마치고 난 뒤에는 직접 내린 커피를 한잔 하며 쉬다가 서재에 들어가 어제 하던 일을 마무리 하기위해 컴퓨터 앞으로 간다. 젊었을 때는 현장에서 사람들과 부딛치며 일 했었는데, 그동안 성실히 일 해왔던 커리어가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아 몇 년 전 부터는 집에서도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남들이 말하는 프리랜서가 된 것이다. 감사하게도 꾸준히 찾아주는 몇몇 사람들이 있어 가계에 은근히 보탬이 된다. 얼마 있으면 남편의 휴가인데, 우리는 1년마다 적금을 들어 해외에 여행을 간다. 소박하게 예산을 세워 떠나는 여행이지만 매번 가족들끼리 쌓이는 추억들이 참 소중하다. 일하는 도중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자식문제로 걱정이 많은 친구인데 이번에도 역시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나는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며 친구가 그렇게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고 위로해준다.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는 것은 언제나 쉽진 않지만, 그만큼 나를 신뢰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분명 감사한 일이다. 저녁이 되기 전에 일을 중단하고 서재를 정리 한 후에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나왔다. 우리 동네는 자전거를 타기 좋은 평평한 동네이다. 10분정도 발을 놀리면 아름다운 인공호수가 펼쳐진 공원이 나온다. 나는 자주 이곳에 와서 운동을 하거나 시집을 읽는다. 저녁시간이 되어서 해야 할 집안일을 세어보며 집에 들어간다. 집안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니 어느덧 사랑하는 가족들이 하나둘 집으로 들어온다.


당선자 인터뷰: 장수민 학생(불어불문학과 4)

 

홀로 떠난 프랑스에서 새로운 성공을 보다

평소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본 후, 개인 홈페이지에 감상평을 자유롭게 남기던 그녀. 파워블로거는 아니지만 장수민 학생(불어불문학과 4)은 틈틈이 글을 써내려갔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참가하게 된 첫 공모전. 뜻밖의 수상에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이다. “이번 수상으로 글 실력을 인정받게 된 것 같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번 작품의 주제는 그녀가 프랑스에서 겪었던 일이 계기가 됐다. 프랑스의 매력에 푹 빠진 그녀는 프랑스로 교환학생을 떠나기 위해 1년 동안 발품을 팔며 돈을 모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교환학생에 떨어지게 되면서 그동안 번 돈으로 무작정 프랑스 여행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본 프랑스의 문화는 한국과 사뭇 달랐다.
그녀는 어떤 일을 하던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갖는 그곳 사람들의 모습에서 자연스레 성공을 강조하는 한국사회에 대한 비판의식도 생겨났다고 말한다.
 

이제 곧 졸업을 앞둔 그녀 역시 취업준비생으로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 진정한 성공이란 타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관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오늘도 자신만의 성공을 위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그녀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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