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가장 어두운 곳에 스며드는
최원준 학생(중국어문학전공  3)

몇 년 전 유행처럼 자기계발서가 홍수처럼 쏟아졌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정작 공부는 안 하고 공부하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자기계발서만 탐독했다. 실천으로 옮기려 했었지만 모두 나랑은 안 맞는 방법이었는지 일주일을 채 넘기지 못하고 실패했다. 단 하나, 계발서의 내용 중에서 꾸준히 지켜왔던 것이 있었는데 바로 “모든 일에 있어서 밝고 긍정적인 부분을 의식적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책에선 성공한 사람들이 긍정의 미학을 이야기하고 긍정적일 때에 사람의 힘은 시너지 효과가 난다고 했다. 그 말만 철썩같이 믿고 최긍정씨로 살며 그럭저럭 공부해서 공대에 진학했고 군대에도 갔다. 힘든 군대생활도 긍정적인 부분을 애써 찾아가며 자기합리화를 열심히 했다. 나름의 작은 사회인 군대에서 끼리끼리 뭉치는 학벌사회를 발견했다. 학벌사회를 비판하기보단 학벌사회의 중심으로 들어가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 안에만 들어가면 뭔가 더 큰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것만 같았다. 꽤 긴 고민 끝에 전역 후 재수를 했다. 전공보다는 학벌이 더 중요했던 나는 타 대학의 상경계열을 포기하고 중앙대의 인문대에 진학했다.


입학하고 막 들뜬 새내기 시절을 보내던 첫 학기 때이다. “독서와 토론”이라는 공통교양 시간에 『타인의 죽음』, 『디아스포라 기행』 등의 작품을 읽고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안타까운 일들을 살펴본 후, 우리는 과연 어떤 자세로 세상을 바라볼 것인가를 토론하였다. 『타인의 죽음』이라는 책은 지구 저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들, 예컨대 전쟁이나 기아 등의 참혹한 현상들을 우리가 평소 텔레비전이나 여러 대중매체를 통해 그저 영화 속의 한 장면, 게임 속의 한 챕터 정도로 여기며 가볍게 소비한다고 문제제기를 했다. 실제로 저 사람들은 고통에 빠져있으며 그런 그들의 고통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공감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디아스포라 기행』은 재일조선인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의 문제점을 지적한 책이다. 재일조선인이라는 독특한 신분에서 나오는 우리와는 다른 관념세계, 그리고 그들을 이해하려하기보단 “우리”를 강요하는 일본 및 남한정부에 대한 비판 등이 실려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세상에는 기쁘고 행복한 일들, 슬프고 힘든 일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존재하고, 내가 굳이 슬프고 힘든 일을 찾아서 괴로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항상 행복하고, 항상 즐겁고, 항상 사랑하며 살기에만도 80여 년의 인생은 너무도 짧다고 생각했다. 긍정적인 생각만으로도 바쁜 내게 갑작스레 세계 저 반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을 주제로 토론을 하고 어떤 자세로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는 시간은 매우 낯설었고, 전혀 쓸데없는 곳에 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것만 같았다. 여기서 백날 탁상공론 해봐야 지구반대편의 그들의 삶이 무엇이 변한단 말인가! 또, 재일조선인들은 왜 남한을 조국으로 여기지 못하고 남북 간에서 갈등하며 이도 저도 아닌 상황으로 내몰릴까 답답하기만 했다.


첫 한 달을 꾸역꾸역 버티고 나서 수업이 끝난 직후에 당돌하게 교수님께 질문을 던졌다. 사실 질문이라기 보단 비판에 더 가까웠다. “왜 굳이 이런 괴로운 일들을 들춰내어 우리가 정신적으로 슬프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기분이 들도록 만들어야 하나요?”, “인생은 즐거운 것들만 보기에도 짧은데, 왜 교수님께서는 즐거운 작품 대신에 이렇게 슬프고도 한 글자 한 글자 읽기 힘든 작품들을 토론의 주제로 정하셨나요?” 교수님께서는 약간 당황한 듯 눈빛을 흐리시더니 이내 평정을 되찾으신 후 옅은 미소와 함께 말씀하셨다. “그래도 한쪽에서는 엄연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인데 누군가는 생각해야겠지요.”


나는 왜 그 사람이 내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여전히 의문부호를 품은 채 방학을 맞이했다. 머릿속에서는 ‘그 교수님께서 혹시 염세적이신 분은 아닌가? 저렇게 살면 인생이 고달프고 힘들 텐데 불쌍하다.’ 라는 작은 동정심마저 느꼈다. 교수님께서 그러건 말건 나는 나의 신조대로 “인생의 밝은 면”, “긍정적인 면”만을 보면서 살리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은 입학 전이나 후나 변하지 않았다. 나는 열심히 나 자신을 위해, 나의 미래를 위해, 더욱더 성공하기 위해 학원을 다니고 도서관을 드나들며 나름의 알찬 방학을 보냈다.


2학기가 되었다. 이번에는 “글쓰기 2” 과목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교수님께서는 수업 첫날 이번 글쓰기 수업의 주제는 “사랑”이라고 했다. 여태껏 그런 수업을 들어본 적이 없었던 나는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벙 쪄있는 상태로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남녀 간의 사랑을 주제로 수업이 진행되는 것 같았지만, 이내 단순한 남녀 간의 애정을 주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나와 함께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들을 대상으로 한 사랑이었다. 매일 서너 장씩의 프린트를 출력해오셨는데 시부터 문학비평, 사회문제에 대한 논평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주제의 글들이 매시간 우리를 기다렸다.


남녀 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제재도 많았지만 나를 가장 고뇌에 빠뜨린 것은 희망버스나 반값 등록금 등 당시의 사회적 현상을 다룬 제재들이었다. 그동안 정치사회적인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신문과 뉴스에서 나오는 내용만 대충 보고, ‘저 사람들은 왜 이렇게 현실에 불만을 표출할까?’ 하고 짧고 가벼운 물음을 날린 후엔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었다. 이런 주제로 생각을 깊이 하려고 하면 생각하기 전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그런 내용을 가지고 매주 두 시간씩 골몰하자니 너무 고통스러웠다. 1학기의 “독서와 토론” 수업처럼 왜 굳이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 같은 부분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 가장 큰 사회적 화두는 쌍용차 문제였다. 희망버스가 몇 차례 운행되었고, 서울 대한문 앞에서도 지속적인 시위가 이어졌다. 이에 대해 ‘나는 왜 그 사람들은 굳이 사회적인 갈등을 조장하려 할까?’, ‘나라가 하는 일에는 무조건 반대만 하는 사람들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왜 선량하게 법을 지키는 시민들이 그들로 인해 피해를 보아야 하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은 배려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억울하면 법에 호소하면 되지 않는가 생각했다. 고소를 하면 법치국가인 대한민국에선 당연히 그들의 억울한 입장이 풀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사회적 약자로서 법의 보호영역에서조차 벗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설마 정말 저럴까?’, ‘어떻게 21세기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가 있겠어? 분명히 아닐 거야.’라고 생각했다. 내 마음의 저 낮은 곳에서는 세계가 비합리적으로 그들을 대하는 것이 아닌데도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에 대한 나의 시선은 전보다는 따뜻해졌지만 그저 그들의 상황에 대해 약간의 동정심을 갖는 정도에 그쳤다.


그렇게 한주 두주 시간이 흐르던 중이었다. 우리 학과는 2010년도 학내 구조조정에 의해 재편된 학과였다. 학생회실과 과실은 물론 교수연구실 모두 없는 상태였다. 2학년으로 올라가기 전까진 당연히 생기겠거니 생각했었는데 행정실에 문의해본 결과 겨울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그 시점까지도 아무런 대책이 없는 상태였다. 당연히 제공되어야 할 것들이 없다는 사실에 분개했고 앞으로도 별다른 대책이 없다는 사실에 더욱 분개했다. 우리 학교가 발전 과정에서 여러 부분에서 진통이 뒤따르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그 취지도 공감했었지만 그 희생을 아무런 동의도 없이 나와 내 동기들에게 강요하는 상황은 너무도 어이없었다.


우리는 우리들이 처한 상황을 여러 방도로 학우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다들 지나가는 말투로 “학생회실이 없으면 안 되지”, “교수연구실이 없으면 어떡하니”, “과 사무실도 없어? 정말 불쌍하다.” 한마디씩만 하고 지나갔다. 그나마 이렇게 동감이라도 해주는 친구가 좋았다. 어떤 친구는 “학교가 공간이 좁으니 어쩔 수 없지 뭐”라고 현재 상황을 매우 냉철하게 평가했다. 당사자인 나와 내 동기들은 중앙인으로서의 권리가 짓밟히고 있는데 학교의 발전이라는 명목하에 우리더러 희생을 감수하라고 했다.


그동안 학교가 학교전체의 발전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과정에서 이런 저런 문제들은 계속 생겼고, 나는 그 때마다 문제 당사자들의 처지는 안타깝지만 그래도 거시적 측면에서 바라봤을 때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떠안고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내가 그 문제를 떠안은 것이었다. 왜 내게 그런 희생을 강요하는지 속상했다. 희생은 본인의 마음에서 우러나올 때 그 힘을 발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 사회를 바라보니 수많은 약자들이 신음하는 것이 보였다. 그제서야 나는 진정한 마음으로 저 사람들이 얼마나 억울한 마음이 들지, 저 사람들이 불법을 저지르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을지, 들리지 않았던 그들의 외침이 들렸다. 그들이 법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잘못이 있는지 없는지를 떠나서 그들에겐 그들의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이야기에 귀를 막고 있었다. 이전에 별 감흥 없이 한번 보고 스쳐 지나갔던 한편의 시가 떠올랐다.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 마틴 니묄러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 나는 침묵했다; /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 나는 침묵했다; /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다. //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 그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대의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말했던 그 모든 것들에는 사실은 개개인의 견디기 어려운 슬픔들이 묻어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나는 가장 공정한 심판자인 냥 공리주의적 시각에서 장기판의 말을 두듯이 쉽게 생각했었다. 장기판의 “마(馬)”도 사람이었고 “졸(卒)”도 사람이었는데 그것을 몰랐다. 마(馬)가 죽던 졸(卒)이 죽던 왕(王)만 살려서 그 게임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생각했었다. 긍정적인 부분만 보아왔던 최긍정씨는 사실은 한쪽 눈을 애써 감은 채 살아왔던 것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했고,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았다. 일종의 노신이 비판했던 정신승리법이었을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모든 어두운 것들을 외면해온 나였는데 거꾸로 나의 문제를 외면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게 되자, 내가 어둠이 되자 그렇게 서운하고, 그렇게 속상하고, 그렇게 외로울 수가 없었다.


물론 정말 감사하게도 인문사회계열 행정실은 나치와는 전혀 비교가 불가한 곳으로 다른 어떤 곳보다도 학생들을 생각하고 학생들을 위해 노력하는 곳이었다. 당시 인문사회계열은 만성적인 공간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행정실장님과 고개를 맞대고 논의에 논의를 거듭한 결과, 아쉬우나마 크기도 작고 공간도 후미진 곳이긴 했지만 뜻깊은 학생회실을마련할 수 있었다.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간 후, 수업의 내용이 다르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 안의 베일을 벗고 본 졸(卒)들의 상황은 정말 가슴 아팠다. 내가 그들을 위해 따로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도 가슴 아팠다. 법은 그들을 판단하는 한가지의 기준에 불과할 뿐이었다. 세상은 슬픈 일들 천지였다. 그리고 그제서야 내가 어떤 학문을 배우고 있었는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림으로 다가왔다. 내가 지난 일 년 동안 배워왔던 그 글자들이 잔잔히 내 마음속을 흘러갔다. 나의 학문은 세상에 가장 어두운 곳까지 비추는 공감의 학문이었다. 1학기 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그럼에도 보아야 할 그 사람”이 왜 나였는지 알 것만 같았다. 다시 바라본 세상은 곳곳이 슬픈 일투성이였고 그래서 나는 더욱더 괴로워졌지만 오히려 역설적으로 나의 마음은 더욱더 따뜻해지고 무엇인가 가득 차는 느낌이 들었다.


 신문을 자주 보게 되었다. 이 신문 저 신문 가리지 않으면서 본다. 신문 속의 세상은 기쁜 일들보단 슬픈 일들이 훨씬 더 많다. 여전히 내가 슬픈 사연들에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다만 진정으로 그들의 입장을 생각해보고 그 아픔을 공유할 뿐이다. 그래도 나는 생각한다. 우리 국민들이 모두 이렇게 그 아픔을 공유한다면 그래도 조금은 더 나은 미래가 되지 않을까?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변했는데 오늘보다 내일은 더 많은 사람들이 가슴이 더 따뜻해지겠지.

 

당선자 인터뷰: 최원준 학생(아시아문화학부 중국어문학전공 3)


사소한 관심으로부터의 시작

한 편의 글을 써내려갔다. 누구를 위해서라기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다. 기대 없이 듣게 된 이정현 강사의 글쓰기 교양 수업으로 글 쓰는 ‘맛’을 알게 됐다는 최원준 학생(아시아문화학부 중국어문학전공 3). 그 ‘맛’과 ‘경험’이 얼마나 숙성됐던지 결국 제3회 수필문학상 당선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난생 처음 수필을 써봤다는 최원준 학생의 글은 제법 단단한 구성력을 갖추고 있었다.


“내리 글만 쓰는 뻔한 수업이 아닌 ‘사랑’이란 키워드 속에서 여러 문학 장르를 재해석하는 수업이었어요.” 덕분에 최원준 학생의 메모장은 날로 두터워져 갔다. 지금 이 순간의 풍경과 물음을 포착하기 위함이다.
그 누구보다 섬세하다고 할 수 있는 그는 주변 이야기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인다. 당선작 「가장 어두운 곳에 스며드는」에서도 나타나듯 학내에 펼쳐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의식을 끊임없이 곱씹는다. “보이는 것에만 치중해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비판의식이죠. 그래서 수필을 써내려갈 때 첫 문단을 앞두고 무척 고민이 많았어요.”  


수도 없이 고민하고 되묻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한다는 그. 그래서일까. 그의 정갈한 사고의식은 수필 속에서 더욱 빛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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