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부모를 죽였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그녀가 오랫동안 바랐던 일을 실행으로 옮긴 것뿐이므로. 인간에게 부모를 죽인다는 것은 사실 ‘금기’다.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는 항상 공경의 대상이며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한다. 그러나 ‘2013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중 하나인 이재찬 작가의 『펀치』(민음사 펴냄)는 존속살해를 저지르고도 죄책감조차 가지지 않는 주인공을 내세우며 파격적인 시도를 보였다.
 
  주인공 방인영은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이다. 변호사인 아버지와 절세미인인 어머니 아래서 부유하게 살아왔지만 소녀의 가슴에는 늘 큰 멍울이 져 있다. 인영은 자신이 ‘5등급’이라고 자조한다. 외모도, 성적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5등급 인생. 방 변호사(소설 속에서 인영은 아버지를 ‘방 변호사’라고 부른다)가 외동딸을 ‘죽 쑨 농사’라고 취급하면서부터 그녀는 질척질척한 어둠 속에서 살아왔다. 결국 그녀는 부모와의 종언을 선고한다. 부모를 죽임으로써 소녀는 자유를 얻었다. 자신을 옭아맸던 학교도, 친척도, 종교도 모두 홀가분하게 잘라낸다.
 
  주인공 인영이 죽인 것은 단지 부모만은 아니다. 인영이 잘라낸 것은 ‘억압’이다. 부모라는 탈을 쓴 가족, 대학만을 목표로 하는 학교, 위선자들의 자기자랑 시간인 종교, 돈이면 다 해결되는 사회. 소녀가 잘라낸 것은 그 모든 억압의 시스템이었다.
 
  억압이란 단어는 듣기만 해도 불편함을 주지만 사실 그리 멀리에만 존재하는 개념은 아니다. 당연시했던 모든 기관과 상식, 심지어 가족조차도 억압의 잠재성을 지닌다. 문제는 우리가 억압을 억압으로 여기지 않는 데 있다. 우울하고 힘들다, 매일 투정하면서도 그것이 억압 때문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 콩나물 강의실 속에서 미어터지듯 수업을 들어도, 최저시급보다 낮은 시급으로 아르바이트를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에 불과하다. 부당하기는 한데 어쩔 수 없는 것.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사회 구조가 만든 억압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른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라는 신인들의 사상은 왜 수많은 찬사와 지탄을 받았나. 그들은 현실을 표면으로만 판단하지 않았다. 그 내부에 억압이 있다는 혁명적 사상이 아직까지 많은 이들로 하여금 그들의 망령과 싸우게 한다. 이들처럼 인영은 세계에 펀치를 한 방 날린 것이다. 억압의 세계에 당당히 맞서는 것을 이 어린 소녀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은 맞서는 것으로 끝나는 이야기는 아니다. “니가 살인자라 부모를 죽인 걸까? 아니면, 부모가 널 살인자로 만든 걸까?”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낙타’가 묻는다. 낙타는 인영의 꿈속에 존재하는 환영이다. 자신을 ‘절망’이라고 소개하는 낙타는 인영에게 자신이 누구고 왜 부모를 살해했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낙타는 인영의 양심을 꾸짖지 않는다. 거의 진리와도 가까운 낙타라는 존재는 다만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와도 같은 질문만을 남긴다. 
 
  작가는 펀치의 의미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인영의 펀치를 평가하는 대신 ‘왜’라는 근본적인 질문만을 던질 뿐이다. 반항이라는 자존마저 잃어버린 우리에게는 억압에 반항하는 것만도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반항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그 억압의 실체를 파악하고 우리의 반항에 ‘왜’라는 의문을 지속적으로 들이대는 것이다. 이유를 모르는 분노는 폭력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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