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론의 중립이라고 자위하면서 음흉한 속을 감추는 것보다 편파적인 게 백배는 낫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한데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결국 강자 편을 들라는 말 아닌가. …이게 공정한가. 이게 정의인가.”
 
  이 책 한 대목에 반했다. 문장 하나하나를 혀에 굴려볼 때마다 찌릿찌릿했다. 기자란 이렇게 근사한 거구나 싶었다. 이렇게 마음껏 당당할 수 있는 거구나 싶었다. 가슴이 절로 쿵쾅거렸다. 그때부터였다. 기자를 ‘업’으로 삼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었던 책의 한 대목은 곧 작은 불씨로 타올랐다. 그 불씨가 피워낸 열기로 가슴은 내내 뜨거웠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지난해 기자는 그 열기에 꼬박 앓았다. 말 그대로 ‘뭐에 홀린 것’만 같은 날들이었다. 등 떠밀려 하는 일이 아니었다. 오롯이 스스로 두 발을 움직여 살아온 날들뿐이었다. 새삼 돌이켜보자면, 기자의 스무 살은 제법 괜찮았던 것 같다.
 
  그런데 결국 ‘끓는 냄비’에 불과했던 걸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들해졌다. 익숙해졌는지 무심해졌는지, 예전만큼 울고 웃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사소한 것에 더 분노했다. 열을 올려가며 떠드는 것은 대개 츄잉껌 같은 가십거리였다. 요컨대 기자의 분노는 한 뼘짜리였다. 가로세로 한 뼘만 한 공간에서 일어났다가 곧 소멸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아, 진짜?”라고 말하거나, 그보다 좀 더 놀랐을 때 입을 한 번 쩍 벌리는 것이 전부였다.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몸을 들썩거리던 과거에 비하면 참으로 초라해진 셈이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스스로 생각하건대 아마도 권태가 아니었나 싶다. 그 권태가 빚어낸 무력감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올 1년 동안은 내내 기획기사에 매달렸는데, 이게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기사에 쓸 사례를 구하려고 데면데면한 사람들에게 친근한 척 연락을 해야 할 때면 자괴감마저 들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저 12학번 조은희라고 합니다…”로 시작하는 카톡을 쓰고 ‘전송’ 버튼을 누를 때까지 얼마나 두 눈을 질끈 감아야 했는지. 1년이 지나자 기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제 아쉬울 때만 연락하는 사람’이 돼버렸다. 가끔은 억울하기도 하지만, 뭐 이제는 취재 열심히 했다는 훈장이려니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잃은 것도 얻은 것도 있다. 불씨를 잃었고 신문사 사람들을 얻었다. 출사표를 올리는 심정으로 마음의 끈을 팽팽히 당겼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마침표를 찍는다. 이제 학생기자가 아니라 ‘기자를 꿈꾸는 학생’으로 돌아가려 하니 다시 출발점에 서 있는 기분이다. “편파적으로 약자의 편에 서겠다”는 말 한마디에 가슴이 일렁거렸던 그 풋내기 시절로, 이제 기꺼이 돌아갈 시간인 것이다.
 
  처음의 포부를 곱씹어보니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니다. 높은 이상만큼 분노하지 못했다. 사소한 날들을 그냥저냥 살아왔다. 이제 몸과 마음을 좀 추스른 뒤에, 다시 그 불씨에 몸을 태워보아야겠다. 처음과 끝이 같은 사람이 되겠다는 각오로 첫머리처럼 글을 매듭지어본다.
 
  “나는 중립, 균형을 찾기보다 편파적으로 약자의 편에 서겠다. 내가 이런다고 약자들이 이기지도 못한다. 세상이 바뀌지도 않는다. 그러나 나는 힘을 함부로 쓰는 자들에게 짱돌을 계속 던질 것이다.”
 
 
조은희
심층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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