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컴퓨터의 이름은 ‘알레테’, 희랍어로 진리를 뜻한다. 내 조카의 휴대폰 화면에는 ‘어린 왕자’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자기 남자 친구의 애칭이란다. 사실 이러한 애칭과 컴퓨터, 휴대폰은 아무 관계가 없다. 단지 자의적 관계만 있을 뿐이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어떻게 사회적으로 당연시 되는 말과 사물의 관계를 규정지을까? 

 

서구 사상사의 주저인 『말과 사물』에서 미셀 푸코는 아르헨티나의 작가 보르헤스에 기대어 이러한 말과 사물의 자의적 관계에 의문을 제기한다. 보르헤스가 인용한 ‘어떤 중국 백과사전’에는 다양한 동물의 구분이 등장한다. 예컨대, a) 황제에게 속하는 것, b) 향기로운 것, c) 길들여진 것, d) 식용 젖먹이 돼지, e) 인어(人魚),  f) 신화에 나오는 것, g) 풀려나 싸대는 개, h) 지금의 분류에 포함된 것, i) 미친 듯이 나부대는 것, j) 수없이 많은 것, k) 아주 가느다란 낙타털 붓으로 그린 것, l) 기타, m) 방금 항아리를 깨뜨린 것, n) 멀리 파리처럼 보이는 것 등 색다른 느낌과 함께 일말의 당혹감을 주는 분류다. 왜 그러한가? 
푸코의 해설은 간명하다. 이 기괴성은 “각 항목들을 서로 연결할 공통의 바탕 자체가 무너져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이 분류의 엉뚱함과 부조화를 느끼는 즉시 불편함이 따라 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물을 몇 개의 말로 구분하기 어려운 낯선 정서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배타성과 분류의 표준척도를 요구하는 동일성의 논리, 즉 지배 담론의 질서에 익숙한 데서 비롯된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논리는 몇 세기를 넘나든다. 17,18세기 유럽 고전주의 시대에 ‘광인’이라는 임상의학적 분류가 거리의 부랑자들을 격리·수용하여 권력의 안정과 무상 노동 착취를 보증했다면, 21세기 한국사회에는 ‘종북’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분류가 다양한 대중들을 분리하는 지배담론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전체주의 시대의 정적은 물리적 폭력으로 제거되었지만, ‘다원주의’ 시대에는 간접적 방식으로도 가능하다. 특정한 ‘호명’을 통해 이루어지는 상징폭력으로도 정치적 배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까닭이다. 이러한 상징폭력의 의도는 ‘정적’의 제거가 아니라 권력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실재하지 않는 ‘정적 효과’와 공포를 조성하는 데 있다. 
 
특정 권력 집단이 제시한 정책과 시스템에 순응하지 않으면 ‘좌파’, ‘종북’으로 호명되는 이 한국사회에서 ‘창조적’이고, 역설적인 상상과 실험은 어떻게 가능한가? ‘다른 생각’, ‘다른 행동’들을 배제하고 한 방향으로 모든 행위들을 몰아가는 이 사회에서 다른 속도와 차이에 대한 ‘공감 능력’은 점차 퇴색되고 있다. 동일한 기계속도가 아닌 서로 다른 차이의 생체속도를 감지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의 회복, 그것은 자유로운 의사표현이 만들 정치적 힘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가능하다. 무엇이 그리 두려운가? 싸이의 강남스타일로 진동했던 파리 에펠탑에서도 ‘파리 시위자’들은 그 정체가 어떠하든 자신의 의견을 표명할 수 있다. 유학생이든 특정 정당 소속이건 혹은 중장년의 파리 교민들이건 그 누구건 소속과 출신에 상관없이 정치적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 그것이 민주주의 사회의 질서이다. 
 
누가 왜 어떠한 명분으로 이 질서를 오인하면서 오히려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일련의 국가기관의 초법적 행태들을 옹호하려 드는가? 마음까지 살얼음판이 될 이 겨울, 차이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흑백 논리가 아닌 말과 사물의 색다른 관계를 실험할 수 있는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한 때다.
 
 
강진국교수
 
신문방송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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