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만화 중에 을미사변과 관련된 만화가 있었다. 그 만화의 내용 중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오랫동안 이웃이었던 두 집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집의 식구가 이웃집에 가서 식구들을 죽이고 집안에 있는 물건들을 훔쳐 갔다. 시간이 흘렀고 강도의 후손이 이제 다시 찾아와 잘 지내보자고 한다. 그런데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를 비유해 놓았다. 우리나라는 그만큼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큰 아픔을 겪은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은 나에게 어렸을 때부터 항상 무의식적으로 반일감정을 주입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전공을 일어일문학으로 정했고 일본에 대해 배우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항상 의문이 들었던 것이 한국과 일본이라는 고래 사이에 새우등 터지듯 나타난 피해자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던 찰나에 뉴 자이니치와 일본인 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감상하게 되었다.
 
  두 다큐멘터리 모두 한일관계의 악화에 희생양이 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첫 번째로 뉴 자이니치의 경우, 일본에 정착한 한국인들의 3대손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은 부모, 조부모 세대가 한국인인 것을 제외하고는 일본에 완전히 동화된 일본인이다. 하지만 한일 양국의 그들에 대한 대우는 차갑기만 하다. 참정권도 없을 뿐더러 영원히 외국인, 아웃사이더 취급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 일본 국적을 가지는 것만이 일본사회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그것에 대해 자이니치들의 참정권 요구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자이니치 출신의 변호사가 나타난 것도 이 흐름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도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일본인 처는 이와 반대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일본인 처는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에 의해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일본 여성을 가리킨다. 이것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하고 일본인 처들이 한국에 오면서 시작되었다. 일본에 대한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한국인 시어머니와 그 일가들은 일본인 처를 못마땅하게 여겨 구박하고, 심지어 일본인 처가 정부가 아닌 첩으로 시집을 왔다며 구박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어떤 사람보다 믿고 따르던 남편의 배신이다. 또한 한국 호적에도 올라가지 못해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무국적자로 평생을 살아온 한 할머니는 몸이 너무 아파 병원에 가도 약을 지을 수 없다고 했다. 
 
  항상 가해자라고 생각했던 일본인들 또한 시대 상황의 피해자인 경우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두가 국적에 관계없이 시대의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한일 양국은 왜 그렇게 서로에게 상처만 주었던 것일까? 일본인에게 냉랭하기만 했던 한국 사람들의 모습에 ‘정 많은 민족’이라는 표현은 무색하기만 했다. 우리 세대는 그런 아픔을 반복하지 않도록 더 많이 공부하고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 합리적이고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는 사회라고 하더라도 소수의 입장을 존중하는 것 또한 민주주의 사회, 현대사회의 기본이다. 그들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무시한다면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얼마든지 다시 생겨날 수 있다. 
 
  내가 본 그 만화가 이제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언급된 강도의 후손 또한 피해자일 것이다. 그들도 그저 하나의 사람일 뿐이지 자신이 알지 못한 사이에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이 저지른 일에 큰 아픔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잘해보려고 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피해자들 또한 머리로는 이해가 되어도 가슴으로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계속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노력하면서 다시는 그런 슬픈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면 머지않아 서로를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천재환 학생
일어일문학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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