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하다 보면, 종종 프랑스인들이 의연하게 내뱉는 ‘싸 데뻥(Ca Depend)’이라는 단호한 한 마디에 부딪혀 망연해지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프랑스어의 싸 데뻥(Ca Depend)이란 영어로 ‘It Depends’, 의역하자면 ‘그때그때 달라요’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프랑스의 정신이라고 하면 똘레랑스(Tolerance)라든지, 프랑스 혁명 3대 정신인 자유, 평등, 박애 등의 단어를 연상하곤 한다. 그러나 누구든 프랑스를 직접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 싸 데뻥이야 말로 프랑스의 정신을 관통하는 가장 적확한 구호라는 데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싸 데뻥의 정의를 간단하게 내리기는 어렵다. 긍정적으로 풀이하면 ‘풍부한 융통성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지만 경우에 따라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태도’라고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프랑스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외국인인 나의 입장에서는 후자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느낀 것은, 싸 데뻥을 완전히 좋거나 혹은 완전히 나쁜 무엇으로 정의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 '싸 데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니스해변의 산책로. 사진제공 김지영 학생
 
 프랑스에서 싸 데뻥의 순간은 매일 새로운 방식으로 나를 찾아온다. 때문에 학교에서도 방심은 절대 금물이다. 어느 날 교수님이 갑자기 수업을 취소하거나, 수업 시간을 변경하거나, 예고 없이 과제를 내주실 때에도 당황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수업 시간표가 업데이트 되지 않았다고 해서 굳이 학교 행정실에 항의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짓이다. 싸 데뻥이기 때문이다. 
 
 비단 학교에서 뿐만이 아니다. 프랑스에서 싸 데뻥의 법칙은 행정 처리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싸 데뻥의 나라 프랑스에서 한 사람의 외국인이 ‘오래’ 살아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막힘없는 프랑스어 실력이나 프랑스 문화와 사람에 대한 풍부한 이해가 아니라, 모든 행정서류를 빠뜨리지 않고 수집하는 ‘꼼꼼함’이다. 그래야만 불합리한 상황에서 증거물인 서류를 제시함으로써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클릭 한 번으로 모든 업무의 처리가 가능한 전자 행정 시스템과 공무원들의 친절한 서비스는 프랑스에서 절대 기대해서는 안 될 것들이다. 대부분의 업무가 종이와 우편을 통해 진행되기 때문에 정확성이 떨어지고, 담당 직원 재량으로 결정되는 것들이 많다. 똑같은 조건에서 한 명은 체류증이 나오고 다른 한 명은 체류증이 나오지 않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왜 프랑스에서는 가능한 것일까? 말 그대로 싸 데뻥이기 때문이다. 
 
 외국인으로서는 이런 싸 데뻥의 풍조가 당황스럽고 때로는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길거리에서 빨간불 파란불 신호는 깡그리 무시한 채 ‘차 있으면 서고, 차 없으면 건너는’ 사람들을 볼 때면 ‘도대체 법은 왜 만들었나’라는 의문이 솟구친다. 그러나 내가 싸 데뻥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이유는 프랑스에서 생활하는 두 달 동안 점점 싸 데뻥을 즐기고, 그로 인해 한국에서는 불가능할 수준의 낙관주의자로 변하는 내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클럽에서 집으로 귀가하는 젊은이들로 터져나갈 것 같은 금요일 밤의 지하철 역, 열차가 천천히 플랫폼으로 들어왔다가 약올리듯 쌩하고 지나치기를 몇 번이나 반복한다. 그래도 나는 열차 기관사를 욕하는 대신에, 옆에 선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고 박장대소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든 일은 사람에 달려있으며, 변수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싸 데뻥의 태도를 체화시키면 불만은 점점 줄어들고 그 자리를 융통적인 사고가 대체하게 된다. 프랑스인들의 이런 태도가 결국엔 프랑스 사회의 똘레랑스를 가능케 했고, 프랑스 국민들을 법과 권력으로부터 보호하는 자유를 선사했으며 오늘날 우리가 ‘선진국 프랑스’의 정신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긍정적인 가치들의 근간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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