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경·김운성 조각가(조소학과 84학번)
  • 임기원 기자
  • 승인 2013.10.13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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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소녀상으로 멈췄던 시간에 숨결을 불어넣다
 
2011년 12월 14일, 평화의 소녀상이 세상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수요집회가 열린지 꼬박 1000회째 되는 날이었다. 소녀상을 세우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평화의 소녀상은 이제 많은 국민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평화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소녀상은 김서경(좌)·김운성(우) 조각가 부부의 손에서 탄생했다. 위안부 문제 외에도 평소 사회문제를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노력하는 두 사람의 삶을 들여다 봤다.
 
 
 

 

 

지난 9일, 1095회를 맞이한 이날 수요집회에는 500여 명의 참석자들로 북적였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푯말을 들고 있는 학생들과 나란히 앉아 있는 소녀상. 짧게 잘린 단발머리에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두 손과 뒤꿈치를 들고 있는 맨발의 소녀상의 모습은 연약해보이지만 단호한 표정이었다. 이러한 소녀상을 만든 김서경·김운성 부부를 수요집회에서 만나봤다.
-언제부터 수요집회에 참여했나.
서경 수요집회가 처음 열리던 날부터 함께 힘을 실어드리고 싶었지만 사실 그동안 계속 그러지 못하다가 2011년부터 참여하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시간이 날 때마다 자주 참석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평화의 소녀상’을 만들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운성 1991년에 김학순 할머니가 ‘나는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말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위안부 문제가 실제로 확인된 날이 있었어요. 그렇게 시작된 수요집회가 1,000회를 맞이하게 될 즈음인 2011년 5월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을 찾아갔어요. 미술하는 사람으로서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더니 평화비 디자인을 부탁받았죠. 그렇게 소녀상과의 인연을 시작하게 됐어요.
-처음엔 평화비였다니.
운성 평화비를 디자인하다보니 아무래도 비석으로는 예쁘게 만들어도 그 의미가 살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아내와 둘이서 아이디어를 20개 정도를 냈어요. 그중에 아내가 생각한 소녀라는 이미지를 선택하게 됐죠.
서경 지금의 위안부 피해자는 할머니지만 끌려갔을 당시엔 어린 소녀였잖아요. 그 부분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소녀상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하고픈 메시지가 있을 것 같다.
운성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처음 세상에 알려졌을 때부터 2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항상 할머니의 모습이었잖아요. 하지만 일본군이 성노예화시킨 건 12살 정도밖에 안 되는 어린 소녀였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었어요.  
-소녀상 설치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운성 민감한 사안이다 보니 설치허가를 두고 일본을 비롯해서 청와대, 국정원, 종로경찰서, 외교부가 모두 모여서 대책회의를 열었어요. 일본 측에서는 계속해서 반대의사를 표현했죠. 압력이 정대협까지 들어왔어요.
-결국 설치허가를 받은 것인가.
운성 사실 정식으로 허가가 된 상태는 아니에요. 설치를 두고 정대협과의 회의에서 나온 결론이 ‘설치를 허가받지 못해도 어떤 법적처벌을 받든 무조건 세우자’였어요. 
서경 신기한 건 소녀상을 두고 현재는 좌우가 모두 응원하고 있고 국민들에게 워낙 존중받는 상태라서 사실 청와대도 건드릴 수 없는 상태가 됐다는 거예요.
-설치 당일의 상황이 궁금하다.
운성 수요집회가 1,000회를 맞는 12월 14일 아침 7시에 작업을 하러 갔어요. 일부러 해가 뜨기 전에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서둘렀는데 일본 기자들이 새벽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에요. 제 손짓 하나하나마다 셔터가 쉴 새 없이 터졌고 언론에서 보도도 많이 됐죠. 
-우여곡절 끝에 설치된 소녀상이 갖는 의미가 있다면.
서경 우선 소녀상이 세워지면서 수요집회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커지게 된 것 같아요. 그 이후로 어린 학생들의 참여도 많이 늘었고요.
운성 지난 8월에 ‘민족미술인협회’라는 단체를 중심으로 정대협과 나눔의집 그리고 정신대 문제 연구소가 함께 위안부를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어요. 정대협과 나눔의 집은 방향성이 좀 달라서 평소 함께하는 편이 아닌데 문화라는 코드로 이들을 묶어낼 수 있었어요. 여기에서 소녀상이 큰 역할을 한 부분이 있는 거죠.
 
현재의 소녀상이 탄생하기까지 김서경·김운성 부부의 정성과 수많은 과정들이 거쳐 갔다. 아이디어와의 싸움은 물론이고 소녀상에 들어갈 상징들까지 세세한 부분 모두를 신경썼기에 지금의 완성도 있는 작품이 대중 앞에 설 수 있었다. 
-소녀상의 얼굴만 100번 이상 고쳤다고.
서경 가장 신경 쓴 부분이 얼굴이었어요. 표정을 보면 화가 나 보이지만 차분하게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에요. 소녀상이 일본대사관 앞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본을 직시하게 되는 거죠. ‘나는 어리지만 너희는 과거의 잘못을 사죄해야 한다’는 말을 표정을 통해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운성 약간의 표정의 차이가 굉장히 큰 차이를 만들기 때문에 얼굴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의 소녀상을 만들기까지 정말 100번 이상을 고쳤어요. 이런 정성에 많은 대중들이 공감을 한 것 같아요.
-작품을 위해 공부도 많이 했을 것 같다.
운성 학교 다닐 적에 ‘누리울림’이라는 노래패가 있었어요. 역사적인 문제를 노래로 해서 책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위안부로 끌려가는 소녀들이 등장했어요. 그때부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됐던 거죠. 
서경 잔인했던 일제치하에서 할머니들이 당했던 일들은 정말 끔찍했어요. 어떤 역사적인 사건을 작품으로 표현할 때는 그런 역사들을 공부하고 있어요.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책자와 자료를 보는 건 기본이었고 더 나아가 수요집회에 참여하면서 할머니가 당시에 느꼈을 감정들을 함께 느끼고자 했어요.
-소녀상의 각 부분을 설명해준다면.
서경 소녀상을 보면 주먹을 불끈 쥐고 있어요. 두 손을 가지런히 하려던 원래 의도와는 달리 중간에 소녀상을 설치하지 말라는 일본의 압력에 소녀상을 꼭 만들어야겠다는 의지가 생기게 됐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굳은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소녀의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들었어요.
운성 발뒤꿈치가 들어 올려져 있는데 이건 ‘화냥년’이라고 불렸던 일과 관련이 있어요. 어린 소녀들이 위안부로 끌려가면서 생긴 아픔을 딛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집에서 외면을 당한 거에요. 집은 물론 정부에서도 제대로 된 치유 프로그램 하나 없었어요. 고국을 편안하게 밟지 못하는 그 상황을 발뒤꿈치를 통해 표현한 거죠.
-제대로 된 정부의 대책이 없었다니.
운성 1962년도에 박정희 대통령의 뜻을 받아서 김종필이 일본과 한일 협상을 했는데 여기서 받은 배상은 피해자에게 돌아가지 않고 국가 발전에 돌아갔었어요. 현재는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국민들의 모금을 통해서 생활비를 지원해드리고 있는데 사실 이 부분은 국가 차원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예요. 
-일본 측에서도 배상을 했다고 주장하지 않나.
운성 실제로 보상을 받은 사람이 몇 명 있어요. 그런데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한테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은 개별적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이 아닌 국제법에 따라서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하는 거예요.
-계속되는 요구와 수요집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무관심으로 일관하는데 후속조치를 준비하고 있는지.
서경 문화예술 쪽으로 계속해서 위안부 문제를 알릴 생각이에요. 지난 8월에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도 120여 명 정도의 작가들이 참여해서 약 200점의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어요. 최근에는 미국 글렌데일시에 소녀상을 세우기도 했죠.
운성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만화, 사진, 조각, 그림 등이 많이 나오고 있어요.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구호를 통해 외치고 있다면 우리는 문화예술로 확산시키면서 대응하고 있는 거죠. 결국엔 문화예술을 이길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소녀상에 말뚝을 박는 일본 극우주의자의 태도가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운성 스즈키 노부유키라는 극우주의자인데 이 사건이 터졌을 때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어요. 첫째는 굉장히 화가 난다는 것이고 둘째는 일본이 저 정도의 행위를 할 정도로 우리가 엄청난 것을 만들었다고 느끼게 된 것이죠. 어떻게 보면 소녀가 앉아있을 뿐인 건데 많은 일본인들이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참혹했던 그 시절을 
겪은 건 소녀였다
100번의 손길이
소녀상 얼굴을 스쳤다
 
문화예술의 사회적인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들은 중앙대 조소학과 학생 시절부터 사회운동을 함께하면서 호흡을 맞춰왔다. 대학교 2학년, 연인으로 시작된 김서경·김운성 부부는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변함없이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다. 이제는 눈만 마주봐도 서로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는 그들은 최고의 파트너이자 동료 예술가다.
-아무래도 작업할 때 호흡이 중요하지 않나. 최고의 파트너 일 것 같다.
운성 출퇴근 시간이 정해지지 않다는 점에서 거의 24시간을 같이 있다고 보면 돼요. 70세의 부부보다도 오랜 시간 옆에 있었을 거예요. 이제는 서로 보지 않고 숨소리만 들어도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있어요. 
서경 대학을 졸업하고 미술학원을 운영했던 3년을 빼면 다른 직장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자연스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같은 직종에서 일하니까 작업할 때 서로 필요한 게 있으면 말을 하지 않아도 알죠.
-개별 작품의 경우에도 서로의 영향을 받을 것 같다.
서경 개별적인 작업을 한다고 해도 서로 도움을 많이 주죠. 늘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논의를 해요. 이 사람이 그림을 그리면 제가 색칠을 해주는 식으로 협업을 통해서 일을 하고 있어요.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서경 사람에 대해 항상 생각하고 작업을 해요. 사람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 사회와 문화 그리고 정치를 외면할 수가 없어요. 
운성 다른 재밌는 작업도 많지만 사회문제에 대해서 비껴나가지 말고 직시하자는 생각이에요.
-평화의 소녀상같은 경우엔 돈벌이보다는 봉사의 느낌이 클 것 같다.
운성 사실 봉사로는 할 수가 없어요. 우선 브론즈와 같은 재료값이 너무 비싸고 작품을 옮기는 것도 비용이 많이 들어요. 때문에 시민모금으로 충당하고 있어요.
서경 우리는 주로 상업적인 것과는 관계가 없는 예술계의 아웃사이더예요.(웃음)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경제적인 부분에선 소홀한 편이죠. 
-예술가란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서경 예술은 삶 자체인 것 같아요. 사회참여적인 작품을 만들고 그로인해 나의 가치를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예술이예요. 그런 점을 일관성 있게 가져가는 것이 예술가라고 생각해요.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서경 광운대학교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어요. 소녀상과 학생들이 한 공간에서 함께 있다는 점이 참신하고 새로웠어요. 이처럼 소녀상이 현장을 계속해서 찾아다녔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저희를 원하는 곳이 있다면 찾아갈 생각이에요. 
 
 
일본대사관 앞에서 만난 평화의 소녀상.
 
당신에게
중앙대란?
 
운성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을 할 수 있었던 공간이에요. 특히 예술대학에 진학함에 따라 무용, 사진, 연극,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같은 내용을 가지고 다른 표현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을 만날 수 있어 좋았죠. 지금의 부인을 만날 수도 있었고요.(웃음)
서경 조소과 1기라는 점에서 아무래도 환경이 열악했던 부분이 있었어요. 오히려 그랬기에 자연스럽게 비판의식이 생겨난 게 아닐까 싶어요.
 
 
 
수요일엔 빨간장미를, 수요집회 알고 가세요
 
  수요집회는 일본군 위안부의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집회로 공식 명칭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입니다. 대한민국 일본 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 12시에 열리며 집회는 1시간가량 진행되는데요. 1992년 1월에 시작된 이래 2013년 10월 9일까지 총 1095회의 수요집회가 열렸습니다. 단일 주제로 개최된 집회로는 세계 최장기간 집회로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고 이 기록은 매주 경신되고 있습니다. 
  오는 11월 13일은 1,100회의 수요집회가 열릴 예정이며 수요집회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찾아가거나 홈페이지 방문을 해주세요. 
 
장소
수요집회가 열리는 일본대사관의 위치는 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 6번 출구에서 정부 중앙청사 방면으로 직진하면 됩니다. 
 
참가방법
수요집회는 사전 신청 없이도 당일 12시까지 일본대사관으로 오시면 참석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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