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곤쉴레의 이중자화상 -"디스토피아는 우리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대개 사람들은 하인리히 법칙을 쉽게 무시한다. 파국적인 사태가 다가오기 전 미세한 경고가 끊이질 않고 울리지만 파국의 사태는 끝내 벌어지고야 만다. 문학을 읽는 이유를 물어오면 가끔씩 “문학작품은 파국을 경고하는 하인리히 법칙과 비슷하다”고 대답하곤 한다. (물론 나 자신도 경고음을 무시하는 경솔함으로 곤란한 사태에 직면한 경험이 있기에 이러한 대답은 주로 질문자가 아니라 자신을 향한 충고인 경우가 많다.) 인류의 미래 혹은 우리 사회의 미래, 더 좁혀서 개인의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많은 이들이 물음표를 던진다. 여기에 미래를 배경으로 한 대부분의 문학작품들은 부정적으로 답한다.

 1920년에 발표되자마자 소비에트 연합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체코로 망명해야 했던 러시아 작가 예브게니 자마찐(Evgenii Zamiatin)의 소설 『우리들』(열린책들, 2009)은 ‘29세기’를 배경으로 삼는다. 전 세계가 동시에 참전한 ‘200년 전쟁’이 끝나고 세계는 ‘단일제국’으로 재편성된다. 이 제국에서는 오직 ‘우리들’만이 존재한다. 개인의 이름은 모두 삭제되고 일련번호가 부여되며 비슷한 제복을 입고 모든 건물들은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통유리로 건축된다. 식단과 성교 횟수, 여가 시간까지도 통제되고 ‘개인적인 것’들은 철저하게 부정된다. 제국은 지구를 넘어서 다른 행성까지도 손아귀에 넣기 위해서 ‘인쩨그랄’이라는 우주선을 만들고 모든 국민, 그러니까 ‘번호들’에게 다른 행성을 향해서 제국에 대한 홍보와 찬양글을 남기라는 명령을 내린다. 우주선을 만드는 조선기술자 ‘D-502’은 제국의 명령을 수행하던 중 제국을 거부하는 여성 ‘I-330’을 만나면서 낯선 감정에 휘말린다. 사랑이라는 ‘개인적인 감정’에 빠지면서 ‘D-502’는 ‘I-330’을 돕게 되지만 제국을 홍보하는 글에서 감정의 혼란은 고스란히 반영이 되고 만다.(모든 글쓰기는 개인의 상태를 미세하게 반영할 수밖에 없다) 제국을 지배하는 ‘은혜로운 분’에게 끌려간 ‘D-502’는 뇌의 특정 부위를 제거하는 ‘위대한 수술’을 받고 다시금 제국에 복종하게 된다. 그리고 ‘I-330’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단일제국’의 지속을 확신하는 홍보글을 적는다.
 
 거의 창작된 지 100년 가까이 된 이 소설은 기시감이 짙다. 1949년에 발표된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에 묘사된 ‘텔레스크린’을 이용한 ‘빅 브라더’의 감시체제는 ‘단일제국’의 확장판으로 읽힌다. 그리고 ‘헤일섬’이라는 지정구역에서 복제인간을 ‘사육’하면서 ‘질병’이 없는 ‘건강한 사회’를 지향하는 미래를 그린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의 소설 『나를 보내지 마』 도 마찬가지다. 최근에 발표된 한국 작가 염승숙의 소설 『어떤 나라는 너무 크다』(현대문학, 2013)에는 체제에 대한 비판자들을 배제하고 조용하며 안정된 사회를 추구하는 ‘빙고’라는 세계가 등장한다. (이 소설은 2013년 한국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그리지만 이 시대를 통과하는 우리에게 이미 소설 속의 풍경은 ‘오래된 미래’다.) 
 
 이렇듯 각기 다른 시기에 등장한 미래에 대한 소설들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디스토피아를 그린 소설들은 영화에서도 다양하게 변주된다. 좀비들이 점령한 세계가 등장하는 『월드워 Z』, 소수에게만 허락된 유토피아를 그린 『엘리시움』, 철저하게 계급적으로 통제되는 열차로 미래를 그린 『설국열차』 등 인류의 미래를 그린 텍스트들은 모두 어둡기만 하다. 미래에 대한 우울한 묵시록들은 스펙터클한 영상으로 옮겨지면서 소비되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점차 디스토피아의 서사에 익숙해진다. 이를테면 『설국열차』에서 가장 경악스러운 장면은 제한된 공간에서의 전투 장면이 아니다. 누군가 죽어나가는 와중에서도 담담하게 뜨개질을 하는 무표정한 여자와 노래를 부르며 세뇌되는 아이들의 모습이다. 그것은 잔혹한 경쟁으로 점철된 현실을 살면서 미래라는 예정된 비극에 직면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직접적으로 자신에게 손해가 오지 않는다면, 타인과 세계의 비극에 대하여 안전거리를 확보한 채 스펙터클로 ‘관람’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을 즐기게 된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하루에도 수십 번씩 CCTV에 찍히는 것(범죄를 예방해야 하므로)을 당연하게 여기고 예민하거나 비판적인 글을 적거나 읽는 것을 꺼려한다. SNS에는 간결한 글과 행복함을 연출한 사진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위생적이고 안정적인 ‘단일제국’과 ‘빅 브라더’의 세계, 복제인간이 사육되는 ‘헤일섬’, 비판이 실종된 ‘빙고’의 세계는 견고하게 보이지만 늘 치명적인 균열을 안고 있다. 통제된 디스토피아를 해체시키는 균열은 언제나 개인과 개인의 ‘관계’, 그리고 ‘사랑’이라는 사실 역시 암울한 미래를 그린 텍스트들의 닮은 점이다. 디스토피아 서사들이 거의 예외 없이 사랑에 대하여 다루는 것은 사랑이야말로 체제가 필연적으로 관리하고 감시해야할 ‘혁명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은 세계의 법칙에 의해서 계산되거나 예측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명명한다. 현실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미덕으로 칭송받는 현실에서, 그리고 암담한 미래세계에서도, 우리에게 유일한 구원은 사랑이다. 이 대답이 진부한 진단으로 다가오는가. 그러나 바디우가 역설하는 ‘사랑’은 경쟁의 서사가 투영된 (SBS ‘짝’에 등장하는 식의) 구애의 방식이 아니라 세계의 비극에 반응하는 감수성과 실천의지를 의미한다. 인간은 숫자나 통계상의 지표로 정의되는 무엇이 아니라는 사실, 무수하고 다양한 층위의 감정과 영혼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이야말로 미래를 비슷하게 그리는 수많은 디스토피아 서사가 전달하는 궁극적인 메시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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