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기술을 두고, 좌편향 대 우편향, 진보 대 보수 간의 갈등이 첨예하다.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은 기존의 교과서를 좌편향이라 하고, 기존 역사학계는 이들의 책을 우편향적 역사 해석이라고 몰아붙인다. 하지만 둘 모두 교육부 국사편찬위원회 최종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들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학자들이라면 이러한 갈등을 두고 먼저 이렇게 묻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는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두 가지 역사 이야기. 먼저 김학철의 『우렁이 속 같은 세상』(창작과비평사, 2001).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청산리 대첩’을 독립군이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하면서 크게 승리한 것으로 기술한다. 하지만 김학철, 청산리 전투 ‘최후의 분대장’으로 직접 그 전투에 참여했던 그는 이를 두고 전과가 500배 과장된 과대망상적인 기록이라고 말한다(pp.168-176). 자신들이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는 싸웠지만 열 번에 아홉 번 쯤은 지는 싸움이었다. 어쩌다 한 번쯤 이긴 것도 적군을 한 둘 또는 서넛 살상을 하면 아주 괜찮은 것이었다. 일본과 중국 400만 이상의 군대가 싸우는 판에, 고작 총 몇백 자루 갖고 어떻게 큰 싸움을 벌이겠는가? 항일무장 투쟁에서 우리 단독으로 대첩 운운할 만한 전투는 애당초 치러보지 못했다’(p.175). 그러나 “자꾸 지면서도 일본군이 무조건 항복을 하는 날까지 계속 달려든 것”만은 사실이라고 한다. 전자가 역사가의 기술이라면, 후자는 전투 현장에 있었던 분대장의 기록이다. 전자가 해석이라면, 후자는 사실인 셈이다. 
 
 다음 임종국의 『친일문학론』(평화출판사, 1966). 이 책은 일제 강점기 대표적 친일 문학가들의 이름과 행적을 기록한다(p.467).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미당 서정주. 그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이 책은 그가 ‘징병 적령기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 학도병 지원을 독려하고, 개성에 사는 인씨(印氏) 둘째 아들이 천황을 위해 가미카제 특공대로 출격하여 폭사하자, 그의 죽음으로 인해 삼천리 산천이 한결 더 푸르다고 시를 지었다. 막판까지도 조선의 독립을 가당찮은 꿈으로 치부했다던가. 그는 무슨 이유였든 침략자가 벌이는 전쟁터에 동족의 등을 떠밀었지만 광복 후에도 숨을 필요가 없었다. 1948년 이승만 정부는 오히려 그를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 자리에 추대했고, 1966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준다. 1977년에는 한국문인협회가 회장으로 추대하고, 2000년 그가 죽자 정부는 금관문화훈장을 주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역사 교과서가 그의 친일부역을 언급 않는 동안, 국어책에는 그가 쓴 ‘국화 옆에서’가 한 가운데 있었고, 학생들은 모두 그의 시를 암송했다. 임종국의 책이 기록이라면, 교과서 기술은 일제 강점기 국가와 민족을 등졌던 사람들에 대한 역사적 해석이자 평가이고, 광복 후 그가 누린 영광과 호사는 기록을 모르거나 적어도 외면했던 우리 사회의 역사적 사고와 실천이리라.
 
 한국 근현대사와 교과서, 역사와 실천 간의 이 거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역사 기술의 출발점은 사실과 기록이다. 해석이나 평가는 그 다음이다. E. H. Carr는 『What Is History』(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1) 1장에서 역사란 역사가들의 과거 사실 중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선택적 구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사학자들은 그런 그를 가리켜, 역사란 무엇인가는 말했지만, 역사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는 알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역사란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각자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써 가는 것이라면, 두 가지가 필요할 것이다. 하나는 역사가의 사실과 기록에 기초한 균형적 기술이고, 다음은 ‘역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과 우리 각자의 해석과 평가이리라. 
 
박흥식 교수
공공인재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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