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누구도 ‘시간을 거스르는 자’의 능력을 가진 이는 없었다. 날은 밝았고 해는 중천에 걸터앉아 혓바닥을 날름댄다. 현실은 서라벌홀 6층이다. 굳게 닫힌 과사무실 문고리를 붙잡고 양발을 가지런히 모은다. 지금 선희에게 필요한 건 뭐? O2가 충만한 들숨. 폐부 깊숙이 숨을 밀어 넣는다. 스-읍!
 
  “안↗녕→하→세↗요↘. 중↗대↗신↗문↘ 조→선→희↗ 기자입니다.”
 
  순간 여덟 개의 눈알이 선희의 몸으로 달라붙는다. 그때 머릿속으로 스쳐가는 한 문장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아. 취재거리 또 못 물었구나! 어쩌지. 저 신문사 왕국의 조부장이 앙칼진 송곳니를 비출 텐데…….”
 
  취재거리 하나 못 건진 선희는 신문사로 발길을 돌린다. 쾌쾌한 신문사 냄새가 해방광장까지 몰려온다. 코끝이 찡하니 맵다. 이건 부장 빽 10번 받았을 때의 통증인데. 그렇다. 선희에겐 지금 취재거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제1799호 평가회의가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중대신문 기자라면 매주 치러야하는 혹독한 기사 평가시간이 오고 말았다.
  “선희야! 학적 표기 틀렸잖아!”
 
 
 
 
 
 
오전 8시 59분! 누구보다 빠르게 더 빠르게. 지옥철에 몸을 싣고 떠밀려온 학생들이 뛰기 시작한다. 여학생 앞머리는 일찍이 뒤집어진지 오래요, 남학생 더벅머리는 흔한 애교라. 미친 듯이 뛴 우리의 도착지는 강의실이 아닌 서울시 동작구 흑석동 221번지 중대신문 회의실. 지각비 오천 원만은 내놓을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마지막 주자가 8:59:59에 입장한다. 
 
  한숨 돌릴 시간도 없이 각 부장단은 핫한 아이템을 야금야금 끌어 모아 회의실 의자에 앉는다. 
  “제1800호 아이템회의 시작하겠습니다.”
보도부를 거쳐, 심층기획부를 거쳐 빠르게 도착한 대학기획부의 아이템 분석시간이다.
  “그러니까요. 우린 장학금을 파이로 생각하고. 여러 명이 하나의 파이를 나눠 먹어야 한다면 정확히 똑같은 양으로 잘라…”
순영이의 말이 늘어진다. 듣고 있던 부장단들 하나 둘씩 입을 떠억 벌리며 썩은 이를 자랑한다. 이것은 흡사 치과의사가 가장 좋아하는 경이로운 풍경이 아닌가. 
  “알겠다 순영아. 그래서 네가 이번에 기사로 뭘 말하고 싶은 건데?”
순영이의 말을 자른 야속한 선배. 오늘 이렇게 해서 끝은 날 수 있는 건가?
 
 
 
 
 
 
남들 다 퇴근한 신문사에 아라의 컴퓨터만 홀로 밝다. 깊은 밤을 은은히 비행하는 한 마리의 반딧불이처럼. 아라는 어쩌다 반딧불이가 되었나. 그 애석한 속사정은 부서 특성에 있다. 대학보도부는 오후 6시가 지나면 본부 직원들이 모두 퇴근을 하는 탓에 취재가 어렵고, 다른 부서는 그 부서 나름대로 여유를 부릴 수 있는 날이 바로 수요일. 그러나 문화면과 출판면을 동시에 담당하는 아라의 사전에 여유는 없다. 내일은 바로 ‘Yes썰’의 녹음일. 국내 학보사 최초(?)로 팟캐스트 프로그램을 제작하는데 이게 영 만만치가 않다. ‘나는 꼼수다’는 대본 없이 줄줄 잘도 떠들었다는데, Yes썰은 지난주 대본 없이 방송했다가 제대로 피 봤다. 영화배우 황정민이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하나 놓았을 뿐”이라는 수상소감으로 겸손하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사실 맞는 말인 것 같다. 밥상 차리는 데 손이 얼마나 가는지. 한 명씩 인터뷰를 거쳐 캐릭터를 파악하고, 캐릭터에 부합하게 하나부터 열까지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주는 등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오늘도 아라의 한숨은 깊어만 가고, 보살 능력치는 상승했다는 도시 전설 같은 이야기.
 
 
 
 
 
 
목요일 아침은 학습지 일주일치를 밀렸는데 내일 선생님이 오신다는 걸 깨달았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다. 책상 서랍에 그대로 처박혀있는 학습지처럼 새하얀 내 취재노트! 초고를 재촉하는 부장님의 목소리가 음성지원되는 것 같다. 재빨리 머릿속으로 오늘 내에 컨택해야 할 취재원들의 목록을 스캔한다. 갑자기 웅웅 울리는 휴대폰. [02-820…] 그렇지, 이쯤 되면 힘 있게 중앙대 내선번호로 전화가 걸려 줘야지. 왜 아무도 내 심장이 쿠크다스 보다 약하다는 걸 몰라주지…. 마감 하루 전에 ‘다음 주에 인터뷰 하는 게 좋겠다’고 하시면 제 가슴이 부서져요, 안 부서져요? 망했다. 기사 엎어지기 일보직전이다!
 
  여기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뺨치는 난제가 있다. 오늘 밤을 샐 것이냐, 내일 밤을 샐 것이냐. 거부권 없음. 기사 빨리 쓰고 이틀 다 일찍 퇴근한다 없음. 밤샘은 정해져 있고 넌 결정하기만 하면 돼. 만약 오늘 밤을 꼬박 새우면 금요일 수업엔 꼼짝없이 꾸벅꾸벅 졸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내일 밤을 새자니, 신문사 책상에서 쪽잠을 잔 다음날이면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 어떡하지? 내적갈등은 발단, 전개, 위기를 넘어 절정에 다다른다. 그래, 결심했어! 오늘은 그만 집에 가자! 퇴근할 명분은 넘쳐난다. 난 수업이 있는 학생이고, 넌 내일 써도 되는 기사야. 늦은 밤, 남은 기자들의 얼굴엔 어둠만큼이나 깊은 다크서클이 길게 드리워있다. 자고로 헬게이트는, 목요일 밤에 열리는 것이 진리이니.
 
 
 
 
 
 
폭풍전야라는 말을 3차원으로 옮겨놓으면 딱 이 모습일까. 수업이 모두 끝난 오후 6시, 하나 둘 편집국으로 모여든 기자들의 손이 바쁘게 움직인다. 두 귀엔 이어폰을 장착하고, 두 손은 키보드에 고정. 주중엔 빈자리로 들쑥날쑥했던 편집국이 기자들의 들숨날숨으로 가득 메워진다. 막차를 타기까지 남은 시간 5시간 반. 그 안에 모든 기사를 완료해야 한다! 매주 금요일, 빨간벽돌 2층에 위치한 중대신문사에는 미션 임파서블이 펼쳐진다. 마감을 일찍 한 기자들만 퇴근할 수 있는 무한 마감경쟁체제! 공들여 쓴 기사에 부장이 죽죽 그은 빨간 줄이 난무하면 가슴이 막 쓰리다. 내 기사들아, 다음엔 글빨 좋은 기자 손에서 다시 태어나렴…. 빽을 거듭하면 어느새 내 기사인지, 부장 기사인지 모를 만큼 기사는 환골탈태를 거친다. 밤 열한 시. 기자들도 하나둘 환골탈태하기 시작한다. 예쁘게 차려입었던 원피스와 높은 구두 대신 무릎이 다 나온 후줄근한 트레이닝복에 삼선 슬리퍼를 신는다. 렌즈 대신 두꺼운 뿔테안경을 걸친 얼굴은 이미 민낯인지 오래다. 세수는 기본이고 막 머리를 감아 물기가 뚝뚝 흐르는 기자들을 보는 건 덤덤한 일상의 한 조각이다. 오후 6시에 봤던 그 얼굴이 아닌 것 같은 건 우리의 착각이겠지?
 
 
 
 
 
 
“4면 나왔습니다!” “7면 담당자 누구에요?” 토요일은 일주일 중 가장 데시벨이 높은 날. 조판 작업 때문이다. ‘조판’이란 신문에 기사를 배열해 넣는 일이다. 조판날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다. 첫 번째는 오탈자 미스터리요, 두 번째는 볼펜 실종사건이다. 분명 틀린 글자가 없었는데 지면으로 확인해보면 틀린 글자가 한 두 개쯤은 꼭 있고 아까 전까지 손에 쥐고 있었던 펜이 사라진다. ‘이 펜이 네 것이냐 내 것이냐.’ 펜한테 주인이 누구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어떤 기자는 스티커를 사서 붙이기도 하고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새겨 넣는다. 하지만 펜이 없어져 버리면 무슨 소용이랴. 
 
  벤자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하고, 조판날의 시간은 10배 빨리 간다. 9시에 출근한 부장들은 어느새 3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계바늘이 야속하기만 하다. 앗차! 2시까지 사실 확인이 끝났어야 한다. 이대로라면 새벽까지 조판작업을 할 태세다. 한편 8시에 끝내자는 목표는 이미 요단강을 건너고 있었으니.
 
  토요일엔 팀워크가 가장 중요하다. 내가 쓴 기사의 작업이 끝났다고 끝이 아니며, 우리 부서 작업이 끝났다고 끝도 아니다. 20면, 모든 면이 완료돼야 비로소 The end. 그래봤자 월요일이면 다시 To be continued. 
 
 
 
 
 
 
특명, 신문을 배부하라. 일요일의 미션은 단 하나, 신문을 배부하는 일이다. 신문 배부가 쉬울 것 같다고? 노노, 그렇지 않다. 신문을 들기 위한 팔뚝의 이두박근, 배부대 순례를 위한 오동통한 종아리알이 장착된 기자만 가능하다. 물론 근육질의 몸을 가졌다고 모두 배부 담당 기자에 간택되는 것은 아니다. 필수 요소는 성실함과 긍정적인 마음가짐! 매주 오후 5시, ‘아빠 어디가’ 혹은 ‘맨발의 친구들’을 뒤로 하고 집을 나와야 하고 간혹 친구와 밥을 먹다가도 배부시간이 되면 학교로 와야 한다. 피터지게 치열했던 배부 담당 기자 경합에서 유정과 영화가 배부권을 따낸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누구보다 가장 먼저 신문을 보겠다는 의지, 배부를 하겠다는 강한 욕망이 이들을 배부의 길로 인도했다.
 
  유정과 영화는 일찌감치 예능프로그램 본방사수는 포기했다. 하지만 일요일 저녁약속을 잡지 못한다는 건 언제나 슬프다. 가능성마저 상실된 저녁 데이트. 꼭 배부 때문만은 아닌 것 같지만 우울한 생각은 뒤로 하고 집을 나섰다. 배부대를 찾아 삼만리. 오늘 배부해야 할 신문은 2,400부. 시속 6km의 빠른 걸음으로 휑한 학교를 누비는 사람은 두 사람뿐이다. 배부를 다하고 파김치가 된 유정과 영화는 시체처럼 잠을 잔다. 남친과의 배부데이트를 꿈꾸며….
 
 
 
 
 
죽지도 않고 올해 다시 온 각설이처럼, 또 다시 찾아온 월요일의 아침. 월요일 오전, 할 일 다 끝난 줄 알았다면 경기도 오산이다. ‘라스트팡’인 카우온 업데이트가 남아있다. ‘카우온’은 중대신문 홈페이지(news.cauon.net)을 일컫는 말. 자신이 쓴 기사를 중대신문 홈페이지에 업로드해야 비로소 긴 일주일이 끝난다. 그러면 뭐하나. 또 새로운 일주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하루 24시간, 일주일을 빈틈없이 채우는 것도 모자라 월요일의 절반을 할애하고 나면 또 다시 시작되는 ‘뫼비우스의 띠’. 띠를 따라 빙빙 돌다보면 어느새 종강이 다가올지니.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중간고사 기간을 학수고대하는 기자들의 표정은 자칫 열반의 경지에 이른 것만 같다. 중대신문 기자들은 한 학기에 수십 번 뫼비우스의 띠를 끊어내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오늘도 띠를 따라 걷는다. 쭈~우우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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