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우리 학우가, 어느 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각해보죠! “내가 보고, 듣고, 만지고,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죄다 내 머릿속의 환영이야.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나 뿐이야. 너 조차도 내 머릿속의 관념에 불과해.” 이 말에 독자는 아마, “드디어 얘가 세상 풍파에 찌든 나머지 미쳐버렸구나!” 혹은 “집에 무슨 우환이 있을까?”라고 걱정할지도 몰라요. 그런데 이런 황당무계하게 느껴질 법한 견해도 사실 철학의 심각한 고민거리였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이것은 주관적 관념론이란 어떤 경향을 꽤 고집스레 밀고나가 보면, 도달하게 되는 유아론이란 독특한 견해예요.
 
  이것이 우리의 일상적 관심에서는 마냥 괴상하게 들려도, 학문의 영역에 들어서면 논리적으로 흠을 찾기 어려워 탁월한 철학자들마저도 극복하기에 상당히 골치 아픈 주제였다고 합니다. 철학의 거인이라는 칸트도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물자체라는 재밌는 개념을 상정했다고도 하고요.
 
  헌데 21세기 한국사회는 어쩌면 유아론이 새삼 힘을 얻고 있는지도 몰라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타인과 대화는 하되, 애초에 타인의 존재자체를 인정 않는 현상이 나와 내 주변에 꽤 많을지 모른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제 생각엔, 실제로 이런 경우는 이미 우리의 염려보다 많은 듯해요.
 
  “인터넷의 발달로, 사회 소통능력이 증가하고 사람들이 점차 정보에 기민해진다”는 말은 너무 귀에 익은 말이라 마치 당연하게 들리죠. 분명 전파 가능성, 정보를 주고받는 빈도는 획기적으로 늘었고, 외면 상 의견교환이 잘 이루어지는 것 같죠. 그런데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의 소통”이 과거보다 늘어났는지는 자신 있게 말하기가 힘드네요. 독자들이 아마 포털 사이트, 커뮤니티, SNS에 접속해보면 다음과 같은 대체적인 몇 가지 사실을 관찰하고 수긍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요.
 
  ⑴ 특정 장소에 성향이 유사한 사람이 모이는 경향이 높다. ⑵ 그 성향이 유사한 사람들의 주장도 서로 거의 유사하다. ⑶ 큰 틀에서 성향이 유사해도, 언제든지 작은 문제에서 대립될 수 있다. ⑷ 큰 문제든 작은 문제든 우연히 성향이 대립되는 사람들이 만나서 대화하다 보면, 거의 싸운다.
 
  우리는 누군가와 가끔 싸웠고, 인류는 구석기부터 싸웠고, 앞으로도 싸울지도 모르지만 많은 싸움들은 “안 싸워도 되는” 성격을 가진 것들인 듯해요. 토론은 “어떤 주제에 대해 다수가 각자의 의견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쓰인다고 해요. 헌데 자신 혹은 주변에 많은 토론들이 실은 각자 답을 내려놓았을 뿐더러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유아론적 토론들은 혹 아닐까요?
 
  흔히 선입견이 나쁘다지만, 사실 선입견은 대부분에게 있죠. 정말 최악인 것은 이러한 나의 선입견과 타자의 선입견을 파악한 뒤, 검토하고 지평혼융 시키려고 하지 않는 태도일지도 몰라요. 자신의 오류가능성을 인정하되, 상대방의 전제와 나의 전제를 확인하고 각각에 따르는 결론 도출과정 중 오류가 없는지를 냉정하게 검토하는 열린 태도가 기본 밑바탕은 아닐까요?
 
  방중에 학내 이슈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SNS와 커뮤니티에서 확인할 수 있었어요. 물론 본받을 만한 태도들도 많았으나, 답이 정해진 싸움에 대답만 하길 원하고 질문하기는 원하지 않는 유아론적 토론들도 많이 보았죠. 학교에 빵빵한 건물도 올라가는 것이 너무나 고무적이에요. 서로 다양한 전망을 제시하기도 망설이지 않지요. 그러나 어쩐지 허전해요. 가슴 한군데가 뻥 뚫린 기분이에요. 역시 맹자(孟子)의 말대로 성이 높은 것도 중요하고 쌀이 많은 것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그런 것들이 사람들 간의 화합만큼 더 중요하진 않아서일까요? 아님 인간은 원래 화합할 수 없는 존잰가요? 진정 화합과 이익의 추구는 양립할 수 없나요?
 
하지율 학생(노어학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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