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험 스트레스를 앓던 고3의 기자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만 공부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유난이야!” ‘유난 떤다’는 말은 한순간 기자를 부끄럽게 했다. 그 말 한마디에 기자를 짓누르던 무수한 고민들은 곧 아무 것도 아닌 것, 누구다 다 견뎌내는 성장통 쯤으로 치부되었다. 고3 시절, 스트레스를 못 이겨 수능을 한 달 앞둔 달력을 벅벅 찢으며 그 말이 무척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때의 분한 심정을 대학생이 된 지금 다시 마주한다. 취업이 힘들다, 삶이 각박하다는 20대의 아우성이 곧 ‘유난스러움’으로 묵인되는 까닭이다. 때로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알량한 위로로, 때로는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식의 협박으로 20대가 품은 고통은 스스로 이겨내야 할 숙제로 남았다. 그 반작용으로 20대는 스스로 주체가 되기를 포기하기 시작했다. 꿈 대신 현실을 주문처럼 읊고, 취업과 전공간의 연관관계를 생각한다. 끝없이 비교하며, 단 한 발 물러서는 것조차 불안해한다. 기자는 나약해진 20대의 민낯을 마주했다. 그 즈음이었나. 우리는 참, 불행하다고 느낀 것이.
 
 20대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 여기저기 말을 걸었다. 사람들은 많이 지쳐 있었다. ‘힐링’이라는 말로 치유할 수 없을 만큼 멍들어 있었다. 하나같이 미래에 대한 불안을 호소했다. 남들과 비슷한 수준이 되지 못함을 자책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괴롭히는 이 지독한 경쟁을 그저 ‘마땅히 이겨내야 할 것’으로 감내하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경쟁에 지쳐 혀를 내두르는 사람은 있어도 이것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끔찍하게도 경쟁사회가 어느새 ‘보편’이 된 것이다. 그렇게 여유는 곧 나태로, 숨 가쁜 경쟁은 부지런함으로 탈바꿈했다.
 
 현실의 틈새에서 기자도 점차 물들어갔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다독였다. 우리가 마주한 이 현실은 결코 유난스럽지 않다, 유난스럽지 않다…. 최면을 걸었다. 그 즈음 기자를 두드린 ‘운명적 만남’이 다가온다. 지금도 두고두고 곱씹어보는 운명적 만남은, 바로 우석훈의 저서 <88만원 세대>다.
 
 충격이었다. 오늘날 20대는 저주받았으며 그 책임은 기성세대가 빚어낸 사회에 있다는 생각은 일견 도발적이기까지 했다. 한편으론 “이렇게 생각해도 되나?”하는 망설임이 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도 결국 자기 도피가 아닐까?”와 같은 원인불명의 부채감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88만원 세대>는 많은 영감을 줬다. 더불어 희망이 됐다. 심지 없는 갈대처럼 현실이라는 바다를 유영하던 잠어 한 마리를 흔들어 깨웠다. 다시 고민해볼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불행한가에 대해서.
 
 심층기획부의 20대 기획은 이러한 고민의 산물이다. 가공하지 않은, 날 것의 고민 그대로를 담았다. 20대 스스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면을 펼치는 독자들도 함께 치열하게 고민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20대 뒤에 붙는 수식어를 비워두었다. 심층기획부가 한 학기에 걸쳐 차근차근 제 나름의 수식어를 찾아가듯, 독자들 역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그 빈칸을 채워주길 바란다.
 
 몸이 아프다고 찾아온 환자에게 “누구나 아픕니다”라는 대답은 처방이 될 수 없다. 우리의 고민도 마찬가지다. 병에도 근원이 있듯, 아픔엔 분명히 원인이 있다. 20대는 이제 그 원인을 탐색할 때다. 왜냐하면 오늘의 현실은, 참으로 유난스럽기 때문에.
 
조은희
심층기획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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