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도 무더웠던 지난 여름. 축구팬들의 더위를 식혀줄 단비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U-20 터키 월드컵에 출전했던 청소년 대표팀의 활약이다. 비록 4강의 문을 넘진 못했지만 역대 최약체로 평가 받았던 어린 태극전사들의 투혼은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눈부신 활약의 중심에는 전략적인 조직력을 바탕으로 팀을 이끌었던 이광종 감독(50)이 있었다. 유소년 전임지도자로서 한국청소년 축구의 대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그의 인생을 들여다봤다. 

 
 
 
▲ 사진제공=스포츠조선
 
 
터키에서 열린 U-20 청소년 월드컵이 한창이던 지난 7월 8일,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만든 순간이 찾아왔다. 이라크와의 8강전. 대표팀은 최약체라는 평가가 무색할 만큼 120분 동안 눈을 뗄 수 없는 경기를 선보였다. 비록 승부차기 끝에 안타깝게 패했지만 ‘희생’과 ‘투혼’을 여실히 보여준 경기였다. 대표팀의 지도자로서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과 언론의 관심으로부터 누구보다 바쁜 일정을 소화했을 이광종 감독을 만나봤다.
-언론에서 관심이 대단했다.  
“터키에서 귀국했을 직후엔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에 정신이 없었다. 요즘엔 그나마 여유가 생겼다. 대학시합도 보러가고 모처럼 휴가도 보내고 있다.”
-처음엔 청소년 대표팀이 최약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는데.
“이전과는 달리 걸출한 스타플레이어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조직력에 의한 축구가 필요했다. 팀이 있기에 내가 있고 선수들 또한 있는 것이 아닌가. 우선 선수들에게 팀을 위해 희생하는 법을 가르쳤다.” 
-16강전에서 우승후보였던 콜롬비아를 꺾었다.
“콜롬비아의 뛰어난 개인기에 맞서 우리 선수들이 탄탄한 협력수비를 펼쳤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팀을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좋은 성과를 이뤄낼 수 있었다.”
-선수들을 찾기 위해 전국을 누볐다고.
“고등학교 리그나 연습게임이 열릴 때마다 전국 어디든 찾아갔다. 열심히 발품을 팔아 선수들의 경기를 직접 보고 발탁하려고 했다.”
-감독님도 어린시절 스카우트를 받았다고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정말 좋아했다. 논이나 얼음판에서도 틈만 나면 축구를 할 정도였으니까.(웃음) 그러던 중 초등학생 때 김포 통진중학교에서 열린 시합에 나갔는데 그곳에서 우연찮게 스카우트를 받게 됐다.”
-재능이 있었나보다.
“그 당시에 축구 말고도 높이뛰기, 핸드볼 등 다른 운동경기의 대표로 활동을 많이 했다. 운동에 소질이 있지 않았나 싶다.(웃음)”
-스카우트 제의 이후 본격적으로 축구선수의 꿈을 가지게 된 건가.
“워낙 축구를 좋아하기도 했고 공부보다는 이쪽이 낫겠거니 생각해 이 길을 택했다. 이후 통진 중·고등학교에 입학해 기숙사생활을 하면서 축구연습에 매진했다.”
 
이광종 감독은 축구유망주를 키워내고 있는 통진 중·고등학교에서 축구선수의 꿈을 키워갔다. 이후 1984년, 중앙대 체육교육과에 진학해 흑석과 안성을 오가며 학과생활을 보낸 그는 각종 대회에서 상을 거머쥐며 중앙대 축구부의 명성을 이어갔다. 중앙대 선수로 많은 활약을 보인만큼 곳곳의 프로팀에서 러브콜을 받기도 했던 그는 1988년 졸업과 동시에 유공 코끼리에 입단하게 된다.
-유공 코끼리(유공)는 어떤 축구단인가.
“유공은 1982년에 새로 생긴 석유회사 내의 프로축구단이다. 현재는 연고지 이전을 해서 제주 유나이티드로 이름이 바뀌었다. 당시 유공으로부터 1순위 연고지 지명을 받아 입단하게 됐다.”
-연고지 지명이라니.
“자신의 출신 지역이 경기도면 경기도에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을 연고지 지명이라고 한다. 김포가 나의 연고지였고 유공은 인천에 있었기 때문에 같은 경기도로 묶여 지명되어 간 것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다른 곳을 가고 싶었지만 지명을 받으면 다른 곳으로 갈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공에서 8년이나 선수로 뛰었다.
“그곳에서 적응을 잘했던 것 같다. 미드필더로 8년간 선수생활을 했다.”
 
선수시절, 팀 내에서 살림꾼 역할을 도맡아했다던 이광종 감독은 묵묵히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며 ‘맡은 바 역할을 다 해내는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오랜 시간 여물어야 결실을 맺는다는 ‘알밤’이란 별명이 생긴 것도 그때였다. 그는 유공과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미드필드로서 10년 동안 266경기에 출전해 36골을 터뜨렸다. 그러나 유니버시아드 대표, 국가대표 상비군이라는 과정을 거쳤음에도 끝내 정식 국가대표의 문을 넘지는 못했다. 
-활약에도 불구하고 국가대표에는 발탁되지 못했는데.
“국가대표 선수를 하기에 스타플레이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신체조건이 좋은 편도 아니었고. 그 당시엔 프로선수 생활도 많이 했으니 ‘이 정도면 된 것 같다’ 싶기도 했다.” 
-선수시절 아쉬운 부분은 없나.
“첫째는 더 열심히 했었어야 했다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지도자의 말을 더 잘 들었어야 했다는 거다. 성격상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이런 부분에서 좋은 평가를 받진 못했던 것 같다.”
-선수를 발탁할 때 인성을 중요하게 보는 편인가.
“그렇다. 물론 그 선수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발전가능성도 중요하지만 인성도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팀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점을 많이 보는 편이다.”
-최근 논란이 됐던 SNS 사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공인으로서 그 정도 위치에 가면 자중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지도자와 선수가 대화를 나눴다면 일이 이정도로 크게 벌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안타까운 마음이다.” 
-실제로 선수들의 SNS를 관리하나.
“관리는 하지 않지만 평소 남을 비방하거나 좋지 않은 얘기를 하지 말라고 조언을 해 주고 있다. 대표팀 선수 중 한명이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고 쓴 글이 언론의 칭찬을 받았지만 되도록이면 경기에만 집중을 하라고 말했다.” 
 
 
 
안 가본 학교가 없다
발전가능성 보니
선수의 깊이가 보였다

단점을 장점으로
끌어올리는 게 
감독의 역할이다
 
 
그가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서의 선수생활을 마지막으로 은퇴 후 2년 정도 축구교육실을 운영하던 그에게 2000년 축구협회는 전임지도자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하게 된다. “체계적으로 대표선수를 키워보자”는 협회의 제안을 받아들이며 시작한 지도자의 삶은 어느덧 14년차에 접어들었다. 그를 거쳐 간 선수만 1,000여 명. 그는 대한축구협회의 유소년 전임지도자와 청소년대표팀 감독으로서 화려하진 않지만 묵묵히 선수들을 지도하는 스승이 되고자 노력했다. 
-선수를 선발하는 노하우가 따로 있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는 모르기 때문에 깊이를 봐야 한다. 그 선수가 뛰는 경기를 보고 재능이나 앞으로의 발전가능성을 보는 거다. 가능성이 있다면 단점은 얼마든지 장점으로 보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감독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선수들을 더 빛나게 만들어주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게 감독의 역할이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팀에 들어와서 팀을 위해 노력하게 만드는 것 같다. 성적이 나쁘다고 선수 핑계를 대는 감독은 감독의 자질이 없는 거다. 팀을 만들고 재능 있는 선수를 만드는 것은 감독의 몫이다.”
-지향하는 축구 스타일이 있다면.  
“스페인이나 바르셀로나 같이 기술적인 부분이 강한 축구팀들을 지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선진축구를 따라 하기보단 우리선수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어떻게 끌어올리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따라서 훈련과정을 통해 선수들의 능력에 맞게 스타일을 변형하고자 했다.”
-선수지도를 위해 공부도 많이 한다고 들었다.
“지금은 선수들이 지도자를 평가하는 시대다. 감독으로서 선수들을 가르치기 위해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상대팀 분석을 할 때면 남는 시간엔 비디오 분석 방에서 살고 있다. 선수들 개개인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조언해주는 것이 다 공부인 거다.”
-어린선수를 가르치다보면 간혹 반항기 있는 친구도 있을 텐데.
“사실 성격이 좀 까지고 그래야 공을 잘 차는 것 같다.(웃음) 선수시절에 내가 그런 부분이 있었다 보니 그런 친구들을 더 잘 다루는 편이다. 운동장에서는 무섭게 하다가도 안에서는 주로 대화를 하려고 한다.” 
-대화를 나누다보면 세대차이도 자연스럽게 사라지겠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일단 선수들과 눈높이를 맞추려고 한다. 옛날 그 나이 때를 생각해보면서 선수들과 개인적인 이야기도 나누고 내 경험담을 직접 말해주기도 한다. 선수로 활동하던 때의 아쉬웠던 점을 선수들에게 조언해주고 있다.”
-대표선수들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인연과 명분을 앞세우는 사람도 많을 것 같다.
“물론이다. 그러나 감독이 어떻게 소신 있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추천을 받은 선수 중에서 테스트를 해볼 만하다고 판단이 들면 우선 테스트를 진행한다. 만약 그 과정에서 실력이 없다면 거절하면 된다.”
-그럼에도 대표팀에 중앙대 출신이 많아 학연을 따진 게 아니냐는 말이 있었는데.
“재작년에는 세계대회에 나갈 때 중앙대출신이 한명도 없었다. 그건 그런 무대에 나갈 수 있는 선수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중앙대 출신 선수들이 모두 주축으로 활동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고 있고 실제로 좋은 성과를 얻어냈다. 학연을 따졌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이번 성과를 바탕으로 리우 올림픽대표팀 지도자를 맡아야 한다는 여론이 있다. 
“이것은 내가 선택할 게 아니라 협회해서 결정하는 문제다. 지금은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꼭 올림픽대표팀이 아니더라도 프로팀이 됐든 대학팀이 됐든 내 적성에 맞는 팀이라면 최선을 다하고 싶다.”
 
  이번 대회에서 보여준 그의 리더십과 선수를 보는 탁월한 안목 그리고 탄탄한 조직력이라면 앞으로의 대회에서도 좋은성과를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 사진 한영진 기자

 


잠깐만요, 중앙인들 
U-20 월드컵 알고 가실게요~
 
 
U-20 월드컵
  2002년 한·일 월드컵, 2006년 독일 월드컵,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은 알아도 U-20 터키 월드컵은 조금 생소하신가요? 그렇다면 이번 청소년 국가대표들의 투혼으로 눈부신 활약을 보여줬던 U-20 월드컵에 대해 살짝 알려드리겠습니다.
U-20 월드컵은 FIFA(국제축구연맹)가 직접 주관하는 국제축구대회 중 하나입니다. FIFA는 일반 대중의 수준에서 축구를 활성화시키고자 청소년 세계 챔피언을 뽑는 대회를 만들게 되었는데요. 여기서 U-20 월드컵은 20세 이하 선수들로 구성된 각 나라의 대표팀이 승부를 겨루는 대회입니다. 
  U-20 월드컵은 1977년 음료회사인 코카콜라의 주최로 처음 열린 이후 2년마다 개최되고 있습니다. 1981년 호주 대회부터는 FIFA의 공식대회로 승격됐는데요. U-20 월드컵은 ‘U-20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로 불리다가 대회의 의미를 높이고자 했던 취지에서 2007년부터는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합니다.
경기는 어떻게 진행될까요? 우선 각 대륙별 지역 예선을 통과한 24개 팀이 6개 조로 나뉘어 조별리그를 치른 뒤 조 1·2위 12개 팀과 3위 6개 팀 중 상위 4개 팀이 16강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결승전까지는 토너먼트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FIFA U-20 월드컵 터키 2013 
  그렇다면 이번 대회에서 우리나라가 어떤 성과를 얻었는지 역시 궁금하실 텐데요.
우리나라는 쿠바, 나이지리아, 포르투갈과 같은 조에 편성됐습니다. 조별예선에서 1승 1무 1패(승점 4점)로 B조 3위를 기록했는데요. 조 3위로 16강 직행이 좌절되는 듯 보였지만 3위 6개 팀 중 상위 4개 팀에 포함돼 극적으로 16강행에 오르게 됐습니다.
16강에서는 우승후보였던 콜롬비아와 만났습니다. 개개인의 기량이 뛰어난 콜롬비아와의 승부에서 1:1의 접전 끝에 승부차기로 이어지게 됩니다. 결과는 7-8로 우리나라가 콜롬비아를 꺾고 8강 진출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4강 진출을 눈앞에 두고 8강전에서 만난 상대는 이라크였습니다. 120분의 접전 끝에 3-3이라는 무승부를 기록. 경기는 또다시 승부차기로 이어졌습니다. 아쉽게도 5-4로 패하게 되면서 이라크에게 4강 진출 티켓을 양보하게 됩니다.
이로써 한국은 1983년 멕시코 대회에서 4강에 오른 이후 또 한번의 4강 신화를 눈앞에 두고 안타깝게 8강에서 멈춰야했습니다.
아직 실망하긴 이릅니다. ‘역대최약체’라는 평가를 받은 대표팀이 이룬 이번 성과는 대단했습니다. 그들이 보여준 탄탄한 조직력과 팀워크로 앞으로 있을 대회에서도 좋은 소식을 기대해 봅니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항상 마음속에 존재하면서 유년시절을 추억할 수 있게 만드는 곳이다. 지금도 중앙대 축구 동문회 활동뿐 아니라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대학 OB시합에 학교 대표로 시합에 참여하고 있다. 중앙대 선수로서의 시절이 있었기에 내가 사회에 나가서 성공할 수 있었다. 모교는 죽을 때까지 모교고 죽어서도 남는다는 말이 있다. 내게 모교는 조국과 같은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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