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이니가 데뷔하던 해였습니다. 친구들과 축제 무대에 오르기 위해 큰맘 먹고 핑크색 스키니진을 샀습니다. 형형색색의 스키니진 5벌이 핀 조명을 받았을 땐 곳곳에서 “샤이니! 샤이니!”를 연호하던 누나들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지금 추측하건대 핀 조명이 얼굴로 비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님 ‘누난 너무 예뻐’의 대상이 진짜 자기인 줄 알았거나.   
 
  고백하자면 고등학생 저는 무척 나대던(?) 친구였습니다. 나댔다는 표현보단 추진력이 있었다고 믿고 싶습니다. 항상 친구들이 한데 뭉쳐야 한다면 몸을 불살랐습니다. 총대를 메는 일은 매일이었고, 총무 역할까지 도맡았습니다. 체육대회 때는 직접 고른 ‘노란색 카라티’가 반티(반티셔츠)로 선정되면서 친구들이 병아리가 되는 모습까지 기뻤습니다.
 
  지금과는 다르게 ‘뭉친다’는 표현을 좋아했습니다. 친구들과 바지를 맞추고, 티셔츠를 맞추면서 생기는 소속감과 연대감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없어도 아무렇지 않을 것에 괜스레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어릴 적 외동아들로 쭉 혼자 자라왔던 터라 그런 것인지, 혼자보단 ‘우리’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사는 게 바빴을까요. 그랬던 제가 사뭇 달라졌습니다. 어딜 가든 쏟았던 조직에 대한 사랑은 점점 저에 대한 사랑으로 바뀌었습니다. 중앙대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남보다 1년 늦은 만큼 대학에 무한한 사랑을 쏟을 것만 같았지만 사는 것, 아니 살아가는 것에 치였습니다. 제가 바뀌는 것보다 무서운 것도 생겼습니다. 저와 비슷한 존재가 꽤 흔해졌다는 겁니다. 물론 살아가기도 어려운 ‘요즘’이 이렇게 만든 탓도 적지는 않겠지만요. 
 
  살아가는 것에 치여 중앙대의 ‘핑크색 스키니진’은 사라진 듯합니다. 애초부터 없었을 수도 있겠죠. 이번 중대신문의 ‘중앙대 정체성’ 기획을 보고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정체성을 살리는 것만으로 애교심이 생기겠냐고.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호미가 없으니 삽이라도 들어야죠.
 
  아직 중앙대는 미완의 과제가 많이 남았습니다. 연고가 필요한 구성원들의 상처도 많습니다. 저마다 다치고 깨지고 욕을 먹으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2년 간 중대신문에서 늙으면서 느낀 게 있습니다. 그래도 모두는 중앙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겁니다. 다만 사랑을 표출하는 방법이 달랐을 뿐입니다.    
 
  열세 번의 중대신문을 만들면서 여러분이 표출한 사랑을 잘 해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부족한 솜씨 때문에 훼방을 놓진 않았는지 염려됩니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걱정을 뒤로하고 하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중대신문도 중앙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신문을 만들고 있다는 겁니다.
 
  어느새 마지막 마감입니다. 저도 이젠 중대신문의 독자로 돌아갑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제 자리에서 묵묵히 중앙대를 사랑하겠습니다. 그간 부족한 글 읽어주신다고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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