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있는 학생? 교수님이 묻지만 손드는 이 하나 없다. 학생들은 주입받은 지식에 궁금증 없이 강의실을 떠난다. 그저 배운 지식을 외워 시험지에 써내고 A+를 받는다. 나는 이런 풍경에 의문을 갖지 않았다. 잘 요약하고 잘 외우는 능력을 얻는 것이 대학 4년과 등록금 3000만 원의 결실인 줄 알았다. 대학은 질문을 던지는 곳이 아니라 지식을 외우는 곳이 되어버렸다. 과연 우리는 네이버 검색창보다 경쟁력이 있을까?


  우리는 집에서부터 ‘질문은 다른 사람을 곤란하게 만든다’는 것을 배웠다. 아이의 질문에 난처해하는 부모들은 늘 대답을 얼버무리며 아이들의 입을 막는다. 질문의 해악은 학교에서 더 잘 드러난다. 질문을 귀찮아하는 선생님의 말투부터, 수업이 늦어진다 짜증 내는 아이들을 확인하면 질문할 용기는 사라진다. 이런 분위기는 대학까지 이어져서, 학생들은 수업 도중에 질문하는 학생에게 ‘나대는 사람’이라며 손가락질한다.


  한국 사회는 전통적으로 집단주의 문화가 특징이다. 집단주의 문화는 나를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집단의 일부로 본다. 그렇기에 개인의 독특한 생각이나 행동이 배척된다. 한국적인 ‘주입식 교육 분위기’에 반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나댄다’, ‘튄다’, ‘눈치가 없다’, ‘잘난 척한다’ 등의 비난이 쏟아진다. 여기에 위아래를 따지는 서열문화까지 가세한다. 학생들은 교수님의 의견이 자기 생각보다 위에 있다 느끼기 때문에 “감히 교수님 생각에 의문을 가져도 괜찮을까?”라고 지레 겁먹는다. 책을 읽을 때 저자와는 다른 자신만의 생각이 떠올라도 ‘감히 이 권위 있는 학자의 주장에 반대해도 되는 것일까?’라며 쪼그라든다. 우리들은 질문할 권리를 박탈당한 채 스스로 생각을 검열하느라 바쁘다.


  대학에서 배우는 학문은 모두 기존 세상에 질문을 던지며 자신만의 세상을 창조한 사람들이 만들었다. 칸트,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피터 드러커, 리처드 파인만, 소쉬르, 블레즈 파스칼은 모두 질문을 사랑했다. 질문에 혁신이 있고, 질문에 핵심이 있으며, 질문이 지식 그 자체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무엇보다 질문을 많이 해야 하는 장소에서 질문이 억압된다. 학생들은 질문의 방법이 아닌 질문의 결과들만을 가지고 대학을 나선다. 데카르트는 분명 당시 지식인들이 말하는 모든 것에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처럼 질문하는 ‘방법’ 자체를 모른다. 그렇기에 데카르트의 사고방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데카르트는 의심을 많이 했다’는 것을 외운다. 이렇게 달달 외운 지식만을 가진 이들은 개인의 창조적 생각을 원하는 사회에 나와 당황한다.


  내가 이런 현실은 깨달은 것은 현재 일하고 있는 곳에서의 경험 덕분이다. 나는 4월부터 유대인식 학습방법을 교육하는 학원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이곳에서 학원 업무를 배움과 동시에 학생들이 질문 만드는 것을 돕는다. 유대인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질문이기 때문이다. 랍비 마빈 토케이어는 ‘아이들이 던지는 모든 질문은 절대 그릇된 것이 없으며 오로지 어른들의 빈약하고 잘못된 답변만이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이곳의 아이들은 얼토당토않은 질문이든 아니든 자유롭게 묻는다. 그리고 스스로 그 질문의 답을 찾고 찾은 답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짐으로써 지식의 깊은 심연까지 내려간다. 그들에게 질문은 재미있는 놀이이며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열쇠이다. 질문을 던지며 행복해하는 아이들을 보니, 강의실 안에서 죽어있는 표정으로 앉아있는 대학생들이 떠올랐다. 나는 일할 때마다 생각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 물음표라는 마크 하나라고.

정혜경 학생(사회학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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