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로서의 지역주의감정과 이론으로서 지역주의에는 꽤 심각한 심연이 가로놓여 있는 듯하다. 지역주의의 타파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성의 영역에서는 우선순위를 차지하지만, 선거시마다 대두되는 지역주의적 정서의 현실적 무게를 감당해오지는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 정당한 논리로서의 주장되는 반(反)지역주의와 현실적으로 정당화되어온 지역주의 정서는 어느새 하나의 공생패키지 논리구조를 형성해오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이론적 현실적 괴리의 존속과 복합적인 의식구조 사이에서 형성되고 파생되는 괴물같은 이 지역주의에 대한 논의는 (그 복합한 구조와 측면 중에서 한 두가지 요인에 초점으로 맞춤으로써) 지극히 빈약한 사설조 얘기로 흐르거나 아니면 (현실적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선별적인 측면만을 강조하고 조합함으로써) 편향적인 도그마로 변질되어오곤 했다.

경상도 대 전라도의 대립구조와 등치되던 지역주의에, DJP연합과 기괴한 김종필 세력의 끈질긴 존속으로 부추겨진 충청권 지역주의의 가세, 이러한 왜곡된 정치적 담합에 대한 대항에서 더욱 기묘하게 비틀려진 전 김영삼 대통령 세력과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의 군부출신 정치가들의 야릇한 변론 속에서 특이하게 둥지를 튼 경상도 내의 갈등구조의 확산, 이러한 최근 특징들까지 합쳐져서 지역주의는 여전히, 오히려 민주화의 정치속에서도 굳건한(?) 존립구조를 확대·재생산시켜가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까지 논쟁 중에 있는 대구지역의 위천공단조성 문제는 이러한 복합적이고 착종된 지역주의 논의가 한국정치지형을 더욱 복잡하고 더욱 뒤틀리게 곡해해가는 전형적인 사례로 보인다.

이러한 축적된 난제와 이에 비교되는 척박한 현실과 부박한 이론적 영역에 익숙해져 가는 시점에서, 최영진 박사의 한국지역주의와 정체성의 정치는 여러 가지로 돋보이는 연구성과이다. 민주화과정이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화되어가고 있는 지역정당현상과 지역연구지별 투표현상을 문제시하면서 ‘정체성 가설’을 중심으로 한국의 지역주의 정치형태의 발생과 전개과정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을 제시하려는 목표를 이 책은 지향하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초기 지역주의는 일종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일면 전라도 사람들을 차별하는 사회 문화적 편견으로 존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권력의 지지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동원의 논리로 활용되었으며 80년대를 거치면서 저항과 단결의 논리로 새롭게 부상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주요한 공헌은 80년대 호남지역의 정치적 정체성 형성과정과 이를 통한 지역적 결집이 한국의 정치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중심으로 한국지역주의의 전개과정을 검토한데 있다. 이를 위해서 저자는 역사적 요인이 지역주의에 미친 궤적의 힘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장 강력한 지역적 결집을 보이고 있는 전라도 유권자들의 정치적 삶과 정치적 정체화 과정, 그러한 정치적 정체화가 표출되면서 나타나는 정치사회의 변화, 그리고 그것이 유권자의 정치행태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있다.

지역주의연구에 관한 일천했던 이론적 분석과 논의에 비추어 볼 때 이 책은 지역주의에 관한 다양한 담론들, 즉 근대화론, 역사주의, 정치경제적 차별과 저항, 정치적 동원, 합리적 선택등의 담론들을 신화로서 체계적으로 검토하고, 또 정체성 논의, 행위자와 구조의 관계에 대한 정치적 접근, 정치심리학, 발생론적 접근법 등을 폭넓게 참고함으로써 지역주의 논의의 지평을 확장시켜주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평자가 볼 때 이 책의 가장 큰 공헌은 이러한 지역주의에 대해 80년 광주사태가 미친 파장을 풍붕하고 체계적으로 분석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1970년대까지 전라도지역은 정치적 소외와 경제적 차별, 사회적 편견으로 에워싸인 상황에서 그것에 저항하기보다는 국가와 지배구조에 대한 협력 동화전략을 선택함으로써 개인적 차원에서 머물러 집단지향적인 정치적 정체성을 공유한 정치집단으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1980년 광주사태는 전라도의 정치적 정체화의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였으며 “이러한 정치적 정당화과정은 해방 이후 처음으로 전라도 지역이 시민사회에 대해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분석”은 여러모로 신선하다. 저자는 더 나아가 1980년 광주항쟁을 통해 형성된 정치적 정체성이 80년대 초반의 도덕적 정당화와 프로야구와 같은 비정치적 기획을 통해 심화되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너무 포괄적이고 다소 모호한 ‘정체성 가설’에 너무 많이 의존하는 점, 너무 다양한 이론을 도입하다 보니 일관된 이론들이 다소 허약한 점, 사회적 범주로서의 호남의 탄생에 대한 분석과 박정희 정권과 배제의 정치학에 대한 분석이 밀접히 연계되지 못한 점, 광주사태와 프로야구에 대한 분석과 이후 지역균열과 지역간 경쟁구조에 대한 분석들이 어떤 일관적 내적 논리없이 병렬되어 있는 점 등이 다소 걸리긴 하지만, 여하튼 앞으로의 지역주의 논의에 이 책이 주요한 문제제기로서 충분한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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