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축제의 시즌이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크게 하나된다’는 의미로 대동제라 불리기도 했다. 5월은 장미의 계절이기도 했지만, 민주주의를 원했다는 이유로 제 나라 군대에 의해 처참히 죽임을 당해야 했던 빛고을 광주의 달이기도 했다. 사랑과 낭만을 모르지 않았으나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더 컸다. 또한 문화를 수동적 ‘소비’의 대상이 아닌 주체적 ‘생산’의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축제조차도 불의를 향한 투쟁의 일부로 삼겠다고 사자후를 토하던 친구들도 있었을 정도다. 그만큼 자부심이 있었고, 그래서였는지 솔직히 재미는 없었다.


  그로부터 강산이 두 번은 바뀌었다. 촌스럽게 대동제를 고집하는 학생들은 아마 없을 테다. 광주가 ‘듣보잡’이 된 것을 넘어, 폭동이라 능욕하는 이들이 민주주의를 참칭하는 하수상한 시절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표현의 자유를 들먹인다. 학살에 침묵했거나 북한 배후설마저 흘렸던 바로 그 언론들이다. 민주주의를 부인했던 이들이, 민주주의의 과실을 가장 잘 따먹고 있는 역사의 아이러니. 그리고 대학은 축제에 들어갔다. 학생회에 돈이 있고 학생 간부의 능력이 출중하면, 나름 잘나간다는 연예인들이 들러 서너 곡을 불러주고 간다. 그리고 학생들은 ‘직찍’의 기쁨과 축제의 성공을 동일시한다. 그런 연예인들 가운데 누군가는 ‘개성을 존중하지 않는 폭력’이라는 의미로 ‘민주화’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광주에서 피 흘린 이들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에, 대학 축제가 투쟁의 장이 되어야 할 이유는, 아무리 민주주의가 후퇴했다 한들, 없어 보인다. 내 후배들의 축제는 내 시절의 축제보다 더 즐겁고 유쾌했으면 좋겠다. 대학에서 술을 추방하자고? 무슨 소리. 축제란 본디 주신제와 사육제에서 비롯된 것. 다소간의 방종과 광기를 제거한 축제에 무슨 의미가 있기나 한가. 짐짓 점잔을 빼며, 수시로 그렇듯, 젊은이들의 탈선에 혀를 차는 언론들이여, 당신들이 추방해야 할 것은 술이 아니라 오히려 도덕주의다. 최소한의 근거도 없이 북한군 남침설을 유포하는, 저널리즘 윤리의 기초도 못 갖춘 당신들 자신의 부도덕성이나 질타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축제 속에 정작 대학 자신이 빠져 있는 현실은 적이 씁쓸하다. 비록 촌스럽고 아마추어적이고 그리 즐겁지도 못했으나, 기업과 상품과 연예인들이 우리의 자리를 대신하고 우리의 즐거움을 독점하는 것을 거부했던 과거의 우리가 결코 부끄럽지 않아서 더 그렇다. 연예인 ‘직찍’ 한 번을 위해 지불되는 엄청난 돈이, 결국 학생 자신들을 위해 쓰이는 진정한 돈이라고 생각한다면, 뭐 할 말은 없다. 부디 그렇게 소비하고, 또 그렇게 소비되시라. 자본이 만들어서 팔아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는 이 시대를 탓하고 비관하거나, 거꾸로 ‘푸쳐핸섭’하며 찬미할지니.

정준희 강사(신문방송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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