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평단(評壇)과 흥행에서 좋은 결과를 얻은 연극 <푸르른 날에>가 막을 내렸다. 광주 민주화 항쟁의 격랑 때문에 이루지 못한 두 남녀의 비극적인 사랑을 해학과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나간 작품이다. 흥미롭게도 이 연극은 영화 <지슬>을 연상시킨다. 두 작품 다 고통스러운 과거를 소재로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두 작품의 진정한 공통점은 고통과 슬픔을 바라보는 해학의 태도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해학은 슬픔을, 고통을, 원망을 애도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그러나 <푸르른 날에>와 <지슬>이 보여주고 있는 해학은 모든 과거에 대해, 또는 그 과거의 비극을 반복하고 있는 현재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 죄과와 용서, 가해와 피해의 갈등 상황을 무화(無化)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들을 충돌하게 만들어 제3의 가능성을 생산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화해와 용서의 제스처는 모순과 질곡의 현장을 무조건 덮어두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상처를 들춰내되 그 상처 때문에 절망하지는 말자는 것. 현재로 하여금 과거에 책임을 지라는 것.


  “과연 무엇이 인격의 각 요소들의 내적 연결성을 보장하는가. 그것은 오직 책임의 통일로만 가능하다. … 하지만 그 책임에는 죄과(罪過)도 연결되어 있다. 생활과 예술은 서로가 책임을 떠맡는 데에 그치지 않고, 죄과도 떠맡지 않으면 안 된다.”(미하일 바흐찐) 두 작품이 건네주는 미소는 책임과 함께 죄과도 떠맡아야만 함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이 아니라 현재에 각인되어 있는 선명한 지문(指紋)이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과거는 현재에 출몰하는 유령, 자크 데리다의 표현을 빌면, ‘비가시적(非可視的)인 것의 가시성(可視性)’으로서의 유령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현존성. <푸르른 날에>와 <지슬>을 보면서 과거와 함께 현재가 환기되는 것은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대한 플래시백은 “기억에 매개된 폭력적인 사건이 지금 현재형으로 생생하게 일어나고 있는, 바로 그 장소에 자기 자신이 그 당시 마음과 신체로 느꼈던 모든 감정, 감각과 함께 내팽개친 채로 그 폭력에 노출되는 경험”(오카 마리)이 아닐 수 없다.


  역사를 재현한다는 것은 과거를 박제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나간 시간을 오늘에 살아 숨 쉬게 만드는 것, 잘못된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 과거를 현재에 재공연(再公演)하는 것이리라.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사뮤엘 베케트) 더 낫게 실패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시도할 수밖에 없을 터. 초혼(招魂) 의식을 통해 과거를, 과거라고 하는 유령을 우리 앞에 불러 세우는 일, 이 일은 비록 고통스럽고 지난한 일이지만 더 낫게 실패하기 위해서는 이를 피할 수 없다.


  <푸르른 날에>와 <지슬>을 보면 뜬금없이 웃음이 나오지만 그 웃음 속에는 깊이 모를 분노와 슬픔도 스며들어 있다. 웃음과 눈물의 변증법이라고도 부를 법한 과거와 현재의 관계는 서로를 반영하며 서로를 변화시킨다. 결국 과거를 성찰한다는 것은 현재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분명히 요청합니다만/늘 일어나는 일이라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지 마세요!/피비린내 나는 혼란의 시대/제도화된 무질서, 계획적인 횡포와/인간성을 잃은 인간의 시대에는/아무 것도 자연스럽다고 일컬어져서는 안 되니까요./아무 것도 변화 불가능한 것으로 통해서는 안 되니까요.”(베르톨트 브레히트)

박명진 교수(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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