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밀란 쿤데라의 장편‘불멸’을 보면,느닷없이 작가 자신이 소설 속에 등장해 소설의 주인공과 토론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이같은‘메타픽션’을 비롯,허구와 사실의 경계를 허무는 다양한 소설기법을 창출,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로 추앙받는 남미현대문학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의 탄생 1백주년을 맞아 그에 대한 재조명작업이 활발하다.

보르헤스 문학의 위대성은 고정 관념에 대한 배격이다. 동서양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전통적 서사방식을 해체한 새로운 문학적 양식으로 그는 쟈크 데리다,미셸 푸코 등 서구의 대표적 지성들로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의 원형으로 추앙받았다. 특히 현실과 허구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야기 구조의 환상성은 빈민, 인종 등 갈등이 혼재된 남미의 상황을 상징하는 소설양식으로 평가받았다.

대문호, 그러한 그가 아꼈던 여성화가 라첼 레베나스의 전시전이 지난 9월 29일부터 10월 2일까지 선화랑에서 열렸다. 레베나스는 보르헤스 문학을 화폭에 멋들어지게 옮겨놓는다. 레베나스는 아크릴 물감을 주로 사용하여 속도감 넘치는 역동적 필치, 감각적이고 강렬한 색의 대비를 통해 추상 표현주의의 힘을 느끼게 한다.

라틴문화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탱고를 추는 연인들의 강렬한 이미지를 붉은 빛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보랏빛과 푸른빛이 교묘하게 어울린 색채로 화폭에 담은 꽃과 천사들은 관객을 환상과 허구의 세계로 몰아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녀의 색들은 인식되지 못한 느낌들에 조형적이며 실제적인 양상들을 부여하고 있으며 다채롭고 시적인 영상을 통해 독특한 미의 세계를 창조한다”라고 프랑스 평론가 크라우드 나메르는 말한다. 그녀는 그림을 전시하지만 관람객들은 그 속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보르헤스 문학의 이미지들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계간‘세계의 문학’가을호에서는 보르헤스의 삶과 문학을 재조명하고 대표시를 번역,소개하는 특집 ‘보르헤스 탄생 1백년’을 마련했다.‘보르헤스 특집’에서 평론가 우석균씨는 ‘흑백사진에 갇힌 보르헤스의 천연색 욕망’을 통해“국내에선 보르헤스가 물신화되어 그의 인간적 측면이 신화의 베일에 감추어짐은 물론,그의 문학세계에 대한 갖가지 고정관념을 낳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보르헤스의 작품이 지적인 유희에 빠지고 있으며 문학에 대한 유토피아로 채워진 환상문학이라는 평가는 잘못됐다는 것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연표

● 1899년 8월24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
레스 출생
● 19년 스페인으로 이주.아방가르드 운동인
‘최후주의’ 주도
● 23년 첫 시집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
발간
● 35년 첫 소설집 ‘불한당들의 세계사’ 발간
● 44년 두번째 소설집 ‘픽션들’ 발간
● 49년 소설집 ‘알렘’ 발간
● 50년 아르헨티나 작가연맹 회장으로 선출됨
● 61년 사위엘 베케트와 공동으로 포멘터상 수상
● 75년 소설집 ‘모래의 책’ 발간. 세르반테스상을 비롯한 국제적
명성의 상을 수상
● 86년 6월14일 스위스 제네바로 이주한 뒤 간암으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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