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오후였습니다. 농구장 앞을 지나는 데 양복을 쫙 빼입은 남자가 다가오더니 ‘혹시 금교은 교수님 아니세요?’하며 말을 걸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옛날 옛적에 공대에서 나에게 배웠다며, 홈커밍데이라서 왔다더군요. ‘누구누구도 온다네요’하면서 이름을 말하는 데 정작 말하는 당사자의 옛 모습은 떠오르지가 않고 그 학번의 다른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리운 얼굴들입니다. 얼른 가서 우리의 해후를 알려야겠다고, 예전과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다며 기분 좋은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연구실로 돌아와 보니 어느새 카톡이 와있었습니다. 카톡이름이 ‘**아빠’입니다. 카톡 프로필에 있는 5살 정도의 귀여운 남자아이가 아들래미인가 봅니다. 둘이 똑같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토끼같은 자식 낳고 잘 살고 있겠죠. 잊지 않고 알아봐주니 눈물이 났습니다. 잠시 앉아 그 시절을 추억하고 있으려니 문득 ‘그 시절의 학생들의 마음속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조차도 너무나 미숙해서 그저 긴장한 마음으로 얼마나 좋은 수업이 되었을까 싶은데, 모르는 척 지나치지 않고 인사까지 건네주니 그리 나쁜 기억은 아니었던가봅니다. 예전에 가르쳤던 학생의 인사처럼 반가운 일이 또 없습니다.


  이제 곧 종강입니다. 이번학기가 새내기들에게는 특별한 학기였을 것입니다. 새내기들은 이제 바꾸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공부를 보는 관점을 바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생을 보는 관점을 바꾸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중고등학생의 인지 수준에 맞추어 교수학적으로 변환해 놓은 ‘학교공부’를 했었다면 이제부터는 ‘학문’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부 내용이 고등학교 때의 것과 겹친다할지라도 그 관점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문제의 답이 무엇일까만을 생각하기 전에 어떤 방법으로 풀 것인가를 고민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충실한 수업 참여로만 익힐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야의 전문가인 교수님과의 의사소통을 통해 천천히 익혀가야 할, 긴 시간과 정성의 결실인 것입니다. 또한 대학입학은 새로운 인생의 출발입니다. 이제는 고등학교 시절과 같이, 대학에 가면 목표달성이 되는 그런 짧은 유효기간의 삶이 아닙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책임아래 놓여있는, 기나긴 인생역정에 한 발을 내디딘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힘든 가운데에서도 내가 지금 하는 일을 그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통스런 의무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거기서 나름의 기쁨을 느끼며 노력한다면 인생을 돌아보는 어느 시점에서 진정한 웃음을 지을 수 있지 않을까요. 톨스토이는 ‘노력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고 했습니다. 노력의 결실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꼭 얻어지게 됨을 아는 까닭입니다.

금교은 강사 (전자전기공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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