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에서
‘유령’과 같았던 서발턴

기존 체제에 저항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


  지난 10일 서라벌홀에서 ‘한국 발전국가의 사회적 배경’을 주제로 사회학과 대학원의 2013년 1학기 첫 번째 콜로키움이 열렸다. 이날 콜로키움은 ‘박정희 시대의 유령’이라는 제목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과학부 김원 교수의 발제로 진행됐다. 발제에 앞서 김원 교수는 “박정희정권이 막을 내린 지 30년 이상 지났지만 지금까지도 한국사회에 미치는 그의 영향력은 상당하다”며 “한국 현대사에서 박정희라는 인물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서발턴(유령)이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음을 설명하는 김원 교수.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뉜다. 한편에선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인물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지만, 다른 한편에선 민주화를 후퇴시키고 친일 전력이 있는 인물로 부정적인 평가를 한다.


  김원 교수는 극과 극의 평가 사이에서 박정희 집권 시기의 열악한 환경에서 차별받았던 약자와 소수자들에 주목해 ‘서발턴’이란 개념으로 설명했다. ‘하위계층’으로 번역되는 서발턴(Subaltern)은 지배계층의 주도권 아래에 종속되거나 거부당한 계층으로서 여성, 장애인 등의 약자나 소수자가 포함된다. 김원 교수는 도시하층민, 이주민  등을 한국 현대사 속의 서발턴으로 정의하고 은유적으로는 ‘유령’이라고 표현했다. 유령과 같은 이들은 박정희 정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보수적 역사학자들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민중사학자들 사이에서 조명 받지 못하고 주변화돼 온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주체로 인정받지 못한 서발턴에게도 정치적 주체로 재현될 가능성은 존재한다. 김원 교수는 “사회 하층민들은 범죄를 저지름으로써 자신들이 사회로 접근하는 것을 막는 기존 체제에 도전한다”고 주장했다.


  김원 교수는 한국현대사 속 서발턴으로 존재했으나 범죄를 저지르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드러낸 예로 1977년 발생한 ‘무등산 타잔 사건’의 박흥숙을 들었다. 1977년 당시 전라남도 광주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전국체전을 명목으로 광주시는 무등산에 있는 무허가 판자촌을 철거했다. 당시 판잣집에 살고 있던 박흥숙과 가족들은 이때 집을 빼앗겼다. 공무원들이 집을 철거한 뒤 다시는 판잣집을 짓지 못하게 하려고 무등산에 불까지 지르자 박흥숙은 철거를 주도한 공무원 4명을 살해했고 이 사건은 무등산 타잔 사건으로 불렸다.


  2005년엔 박흥숙을 다룬 영화가 개봉했고 최근에도 그를 소재로 한 책들이 출간되는 등 그동안 범죄자로만 평가받던 그를 생존권을 빼앗긴 희생자 혹은 영웅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제기됐다. 김원 교수는 박흥숙과 시민군은 도시하층민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고 개인적 차원의 저항이었느냐 집단적 저항이었느냐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그는 “박흥숙을 범죄자라고만 평가할 수 없는 근거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진행되던 당시 광주 시민들이 그의 가족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박흥숙이 감옥에 있을 때인 1980년 광주에선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식량공급이 중단됐던 시민군에게 박흥숙의 여동생 박정자는 자신이 박흥숙의 여동생임을 밝히며 그의 어머니와 식량을 지원했다. 이때 시민군이 박흥숙의 여동생과 어머니를 범죄자의 가족으로 대하기보단 동지로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해 12월 박흥숙은 사형이 집행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그의 명예는 아직도 공식적으로 회복되지 않았다.


  김원 교수에 따르면 2010년에도 ‘시민군과 범죄자는 동일시할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김원 교수는 “시민군도 역사적으로 재조명되기 전에는 폭도로 불렸다”며 “박흥숙과 시민군의 차이는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시민군은 국가권력이 가한 집단 학살에 저항한 것이라면 박흥숙은 국가권력의 횡포에 혼자 맞섰을 뿐이었다. 또한 서발탄은 스스로의 권리를 언어로 요구하기 어렵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이는 보수적 역사관과 민중적 역사관 사이의 그림자 속에서 서발턴이 역사 속에서 존재할 권리를 잃은 이유다.


  다음달 3일엔 서라벌홀 815호에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사회학과 석좌교수인 예란 테르보르의 초청강연이 열릴 계획이다. 두 번째 콜로키움은 다음달 20일 서라벌홀에서 ‘그들의 새마을 운동’을 주제로 김영미 교수(국민대 국사학과)가 진행할 예정이다.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