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지나치는 풍경들이 있다. 그 풍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사연이 있는 경우가 많다. 기자에게 있어 수습 생활이란 그 풍경에 스스로를 맡기는 과정을 연습하는 것이다. 단순히 기록하는 사람이라는 한자 말을 가진 ‘기자’이지만, 취재해야 하는 사람과 대상에 깊게 접근하지 않으면 단편적인 기사를 낼 수 있고 심하면 오보까지 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세심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필수적인 과정 중 하나가 ‘하리코미’라는 경찰서 생활을 거치는 것이다. 일제 잔재로 아직도 기자 사회에서는 정체불명의 일본식 용어가 많이 통용되는 데 그 중 ‘하리코미’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경찰서에서 먹고 자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취재를 하는 것을 말한다. 대개 수습기자에게는 악몽의 다른 말로 통하는 단어다. 
 
  2년 전의 일이다. 수습기자 신분으로 남대문 경찰서에 ‘하리코미’하던 어느 날, 선배로부터 지시가 떨어
졌다. 서울역에서 얘기가 되는 사람을 만나 취재를 해오라는 것. 나는 노숙자, 상인, 집회참가자, 상경하는 군인 등등 수많은 사람을 떠올렸다. 하지만 ‘너무 진부해’라는 생각이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우연히 눈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폐지를 줍고 계시는 할머니였다. 그분이 특별했던 건 차림이 노숙자에 가까울 만큼 남루했다는 점과 대개의 노숙자들과 다르게 1초도 쉬지 않고 일을 하고 계신다는 점이었다. 다가가기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노숙자들은 적개심이 많은 경우가 많고, 접근하는 사람이 기자라면 더 피하려 하기 때문이다. 
 
  따뜻한 두유 하나를 가지고 말을 건네던 순간을 기억한다. 어색했지만 그분은 의외로 말하기를 꺼려하지 않았다. 중국 동포 신분으로 중국에서 결혼 후 한국으로 돌아온 사연, 남편분과 딸이 장애인으로 경제적 능력이 없다는 것과 연락 닿지 않는 아들이 돈을 벌고 있어 수급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것까지.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 갖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이 고스란히 압축돼 있었다. 무심히 지나치거나 관심을 두지 않았으면 몰랐을 우리 사회의 한 풍경이었다.
 
  수습딱지를 뗀 지금도 언제나 취재의 중심은 풍경이다. 마냥 경치만 좋은 풍경이 아닌, 용기를 가지고 많은 이들을 대신해 적절한 질문을 던져 낯선 풍경을 날 것 그대로 전달하는 것. 그게 기자의 의무라는 느낌이다.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 새내기 시절. 소심했던 내게 소모임 가입을 적극 권했던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는 술을 많이 먹을 수 있으니 밑질 것 없지 않냐는 말을 건넸다. 반박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소모임에 가입했다. 그 뒤 나도 모르게 낯설었던 사람과 사물, 그리고 우리 사회의 풍경에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내 위치도 파악했던 것 같다. 낯선 풍경에 던져진 건 기자만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지금, 현재’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필수적인 능력일지도 모른다.
 
이희경 세계일보 기자
국어국문학과 02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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