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직접민주주의의 장이지만
서울캠은 의결 정족수 채우지 못해
성사보단 무산된 경우가 더 많아
중간고사가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공부는 안 하고 여러분께 학생총회를 설명해 드리게 된 김순영 기자입니다. 지난 11일, 7년 만에 성사된 서울캠 학생총회에 다들 참석하셨나요? 만약 참석하지 못하셨다면 정말 아까운 기회를 놓치신 겁니다. 재학 중에 학생총회 성사를 직접 볼 기회가 다시는 생기지 않을지도 모르니까요.
추운 날씨에도 자리를 지켜준 2,055명의 학생들 덕분에 다행히 학생총회는 성사될 수 있었지만 ‘학생총회? 그게 뭐야?’라고 생각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학생총회’는 ‘전체학생총회의’라는 정식 명칭의 줄임말입니다. 학생총회는 학생자치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여러분이 학생대표자가 아니어도, 신입생이어도 모두 동등한 1인 1표를 행사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는 회의이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 직접민주주의의 대학교 버전이라고 할 수 있죠. 학생총회는 대학본부에 여러분의 권리를 직접 주장할 수 있는 최고 권위의 공식 회의 기구인 것입니다.
서울캠 총학생회 회칙 제2장에는 ‘학생총회는 본회의 활동에 관한 최고 의결권을 갖는다’는 조항과 ‘의결 정족수를 재학생의 8분의 1 이상으로 정한다’는 내용의 조항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학생총회의 정기적인 개최 여부는 명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학생총회가 의무화돼 있지 않기 때문에 열리지 않는 학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이제 학생총회의 역사를 되짚어볼까요? 학생총회의 역사를 보면 지난주 열린 학생총회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1957년 발행된 중대신문에서 중앙대에서 열린 ‘학생총회’의 전신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학생총회는 지금과는 달리 학생들뿐 아니라 당시 총장이었던 임영신 총장과 여러 교수들도 참여한 것으로 보아 학교구성원 모두의 ‘행사’ 정도로 보입니다. 반면 1965년 8월엔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내용의 학생총회가 4·19 기념탑 앞에서 열리기도 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학생총회는 학생들의 입장을 전달하는 회의기구가 아니라 학생들이 모여 정치, 사회적 문제에 목소리를 내고 힘을 모으는 자리였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자 비로소 현재의 학생총회 모습이 보이게 됩니다.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때라 학생총회 성사도 쉬웠을 거라 예상하셨나요?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도 의결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무산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1980년대 후반엔 학원 자주화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운동과 비상 학생총회가 연일 이어졌는데요. 비상 학생총회는 자주 개최됐지만 정식 학생총회는 열리기만 할 뿐 성사되진 못했습니다.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인데 당시 의결 정족수 기준인 재학생 수의 10분의 1을 채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나 봅니다.
21세기에 들어서자 학생총회의 초점이 달라집니다. 해마다 인상되는 등록금이 문제로 떠오르게 된 거죠. 2005년과 2006년엔 서울캠과 안성캠 모두에서 학생총회가 성사돼 가히 ‘풍년’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를 제외하면 서울캠에선 학생총회 성사가 가뭄에 콩 나듯 했습니다.
반면 안성캠에선 2004년, 2007년, 2009년, 2011년, 2012년에 학생총회가 성사됐습니다. 심지어 한 번도 성사되기 어려운 학생총회가 2011년엔 두 번이나 성사된 적도 있었죠. 하지만 서울캠 총학생회는 2006년 이후 성사를 이뤄내지 못했습니다.
앞에서 ‘학생총회는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최고의 학생자치방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성사된 경우는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많지 않은데요. 그래서 가뭄의 단비 같은 이번 서울캠 학생총회 성사가 더욱 반가운 것 같습니다.
김순영 기자
시사학술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