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겨울, 경기도 김포군의 한 야산.

20대 후반으로 뵈는 한 청년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당연히 경찰이 몰려가서 현
장에 금줄을 쳐 놓고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죽은 이의 몸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살해된지 이삼일밖에 지
나지 않은 듯했고 겨울철이었으므로 주검의 상태가 양호했다. 현장 수색을 마
친 수사진은 서둘러 지문을 뜨고는 시신을 국립과학수사 연구로 후송했다.

"김 형사, 우선 피살자 신원파악부터 하자구. 지문 조회해봤어?"

반장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그러나 컴퓨터 단말기를 두드리던 김 형사가 난감
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일이네. 이 사람 이미 죽은 사람인데요?"" 이 사람이 무슨 헛소리를 하
고 있어. 아, 그 지문 임자가 죽은 사람이라는 걸 누가 몰라?"
"그게 아니라, 이미 6개월 전에 죽은…."컴퓨터 화면에나타난 지문의 임자는 교
통 사고로 사망 처리된 열다섯 살짜리 소녀였던 것이다.

수사팀에 비상이 걸렸다. 지문을 두세 번씩이나 채취해서 조회를 해봐도 같은
반응이었다. 소녀의 부모가 불려 왔다. 틀림없이 딸은 6개월 전에 경부고속도
로에서 교통사고로 죽었고,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을 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
다.

"이거 미치겠군. 또 이 놈의 전자주민 정보망이 말썽을 부리는데요.""기자들 듣
는데 그 따위 소리 입밖에 내지 말고, 현장 주변 수사 좀 다시 해 봐."수사해야
할 일이 갑자기 세 가지로 늘었다. 죽은 이의 진짜 신원을 밝히는 일과, 주민카
드 정보망이 그 괴상한 요술을 부린 원인과, 살해범을 찾는 일이 그것이었다.

그 셋 중에서 범인을 잡는 일은 의외로 쉽게 풀려 나갔다. 사고 현장을 다시 탐
색한 끝에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전자주민카드를 발견한 것이었다. IC 카드라
고도 부르는, 두께 0.8cm의 그 카드가 만일범인의 것이라면 그는 뛰어 봤자 벼
룩이었다.

"범인 신상이 밝혀졌어요. 이름은 김대두, 나이는 스물여섯. 성일대학 기계공
학과 졸업. 사업가였던 부친은 이북 출신인데 두 달 전에 사망. 열아홉 살 때 맹
장수술 받은 적 있음. 이놈자식, 이거 군복무 시절에 매독치료도 받은 적 있는
데요. 동원 예비군 훈련불참으로 보충교육 받은 적 있고, 카드대금 연체로 금융
거래 불량자로 판정. 고등학교 때 폭행죄로 3일간 구류처분 받은 바 있음. 대학
때 시위 경력은없고, 음주운전으로 현재 면허정지 상태. 전화번호를 금년 들어
두 번 바꿨고, 생명보험 한군데….""됐어. 그만하고 잡아와!" 김대두가 잡혀 왔다.
자신의 모든 것이 수록된 전자주민카드를 현장 부근에 떨어뜨린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그는 의외로 순순히 범행을 실토했다."이북에서 단신으로 월남하신 부친은 자
수성가한 사업가였으나 첫 부인과 사별하고 두 번째로 맞이한 어머니와 나한
테는 대단한 수전노였어요. 죽은 첫 부인한테서 난 아들은 중학을 졸업하자마
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었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왜 미국에 있던 이복형한테는 알리지 않았나?""다른 지역에서 열리는 세미
나에 갔었기 때문에 제대로 연락이 안 됐어요.""왜 죽였나?""이복형이 없어지면
유산을 어머니와 내가 몽땅 다 차지할 수 있어서…."

"그래서 김포 공항으로 마중 나갔다가 수면제를 탄 음료수를 권했고. 김포 야
산으로 데리고 가서 죽이고는 암매장했다. 이 말이지. 그런데, 전자주민카드
는 어떻게 된 거야?"

"금년 초에 형이 미국에서 나와서 주민카드를 작성하고 돌아갔는데, 암호를
알아 두었어요.""그걸 묻는 게 아니라, 왜 죽은 사람의 정보 파일이 없냐 이
말이야!""친구 중에 정부기관에서 정보전산망 취급 허가자에게 주는 보안카
드를 소지한 사람이 있는데, 이 일이 성공하면 유산의 3분의 1을 주기로 하
고 모의를 했습니다.

이복형의 지문을 다른 사람 파일에 옮겨 놨기 때문에 죽이고 나서 패스포트하
고 주민카드만 없애 버리면 완전범죄가 되는 것이었는데 현장에 증거물을 떨
어뜨린 바람에…….""허허, 요놈 봐라. 도대체 어디서 힌트를 얻어서 그럼 발상
을 하게 됐나?""형사님, 혹시 `네트'라는 미국영화 본 적 있으세요? 산드라 블
록이 주연하고 어윈 윙클러가 감독한 작품이오. 여주인공 안젤라가 멕시코에
휴가 갔다가 돌아왔는데, 자신의 부민카드 파일 이름이 엉뚱하게도 루스 막스
로 바뀌어 이쓴 거예요. 그 사이에 살던 집도 팔리고, 차도 처분되고…. 안젤라
라는 미국 사람은 없는 게 돼 버리는 거예요.

그 영화에 보면 국방부 차관도 누군가가 몰래 그 사람 파일로 들어가서 병력
(病歷)난에 에이즈 감염자로 입력해 놨기 때문에 자살을 하게 되잖아요. 물론
영화속의 얘기지 미국은 우리 같은 통합전자주민카드를 시행하지 않고 있다
고 들었습니다만."

"이런 죽일 놈 같으니라고. 반장님. 구속영장 신청하고, 기자회견 하셔야지요."
"잠깐, 김 형사, 나 좀 보자고. IC카드 시행한 지가 1년이 다 돼가는 데도 불구
하고, 아직도 시민단체들에서는 폐지 투쟁을 벌이고 있는 판국이라 이번 사건
까지 알려지고 나면…."결국 그 사건의 수사기록은 "영구미제" 캐비닛 구석에
처박히게 되었다.

시신은 무연고 행려자로 화장되었고, 재산이 탐나 이복형을 죽인 김대두는 무
면허 운전 혐의로벌금 몇 십만원을 물고 나와서 룰루랄라 휘파람을 불며 돌아
다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관에 있던 그의 친구는 근무태만으로 권고사직
당하는 데 그쳤다. 그렇다면 김대두의 이복형은? 적어도 전자주민정보망의 개
인 파일 기록에만 의한다면, 그는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서 백년이고
천년이고 공부만 할 것이다.

- 이 글은 '말'지 9월호에 실린 전자주민카드 관련 가상시나리오(이상락 지음)
을 옮겨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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