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울음이 터지면 부랴부랴 엄마를 찾았습니다. 눈은 울고 있지만 엄마를 만나는 순간부턴, 괜시리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칠 법도 한데 울음소리는 더 커집니다. 엄마에게 제가 지금 서럽다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해서죠. ‘엄마, 나 지금 울고 있어. 나 좀 다독여줘.’ 비단 어릴 적 저만 느낀 감정은 아닐 겁니다.
 
  당사자, 더 꼬집어서 말하면 피해자는 할 말이 많습니다. 서러움도 많습니다. ‘당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를 뭅니다. 누군가에게 지금 내 서러움과 억울함을 토로해야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 현상은 사회적 관계에서 약자에게 더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 을은 항상 서럽고 억울한 존재이며, 갑은 을에게 아쉬울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쯤에서 을은 점점 ‘포기’란 단어가 생각납니다. ‘여기까지구나.’ 하지만 갑과 팽팽하게 당기고 있는 줄을 놓아버리기엔 이릅니다. 한껏 목청 높였던 소리가 허공에 흩어져버리기 때문이죠.
 
  이번에는 좀 달랐습니다. 2010년에 끝난 줄만 알았던 구조조정이 다시 시작된다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조용했습니다. 놀랐습니다. 호들갑은 아니더라도 학내에 적극적으로 알릴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2011년 대학본부가 가정교육과를 폐과한다고 했을 당시를 회상한다면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합니다. 대학본부와 맞서 적극적으로 알려야 할 주체들은 정작 중대신문의 보도를 반기지만은 않는 것 같습니다. 직접 만난 당사자들은 말했습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긁어 부스럼이라. 독자들의 알 권리를 위해 뛰어다닌 기자들을 한 번에 무너지게 만드는 한 마디였습니다. 우물은 말랐는데 기자들은 끊임없이 바가지를 내렸습니다. 취재를 함에 있어 취재원의 사정을 고려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당사자들은 나름의 대응을 철저히 준비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떠오른 학과 구조조정이란 아젠다에 대해 쉬쉬하고 있는 모습은 제 3자인 제가 봤을 때 과연 당사자로서의 모습일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정작 아쉬울 것 없는 대학본부만 적극적으로 인터뷰에 나섰습니다.
 
  행동은 세계를 인식하는 태도입니다. 아직 이들이 행동하기에 중앙대는 너무 팍팍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을이 대응하기에 갑의 덩치는 너무나도 큰 것이 현실입니다. 줄다리기를 시작하자마자 단번에 줄을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을의 입장에선 한 사람이라도 더 모아서 줄을 당겨야만 대응할 수 있습니다. 대학본부와 대립각을 세우라는 말은 아닙니다. 적어도 당사자의 논리와 의견을 표명하기 위해선 목소리를 모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안타깝습니다. 학교는 변한다는데 학생들은 유난히 조용합니다. 벚꽃이 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4월의 봄이지만 중앙대의 바람이 유독 차게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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