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연 
소설가·시나리오 작가 (영어학과 91학번)

 

  밤 10시가 가까워오면 곳곳에서 마니아층이 들썩인다. 방영 기간이면 학생들이 등교를 마친 학교에서도, 회사원들이 출근을 마친 회사에서도 이야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던 드라마들의 방영 시간이기 때문이다. 밖에 나와 있는 사람은 서둘러 DMB를 켜고, 집에 있는 사람은 ‘채널 고정’한 채 뚫어져라 화면을 들여다보는 시간. 최강칠우, 선덕여왕, 뿌리 깊은 나무, 청담동 앨리스 등 아직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트렌디한 드라마들이 모두 이 시간, 같은 작가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박상연씨(42)다. 

  소설도 쓰고 영화 시나리오도 쓰고 드라마 대본도 쓴다. 스물다섯에 등단한 이래 세 권이 넘는 책을 냈고, 세 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었고, 여섯 편이 넘는 드라마를 제작했다. 마흔둘에 접어든 그는 이제 명실상부한 ‘국민작가’가 됐다. 쉼 없이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그는 이제껏 쓰는 것을 멈춘 적 없다. 부지런함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책장엔 참고 서적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공부하기 싫어서 작가가 됐는데, 이게 뭐예요.”
  -공부에 좀처럼 흥미를 붙이지 못하는 학생이었다는 건가요.
  “공부를 굉장히 못했어요. 성적을 1등급부터 10등급으로 나눴는데 9등급이었으니 알 만하죠. 그래도 그런 것에 기죽는 성격이 아니라, 제 할 일 하면서 바쁘게 살았어요. 비보잉도 하고 농구도 하고, 교내 편집부 활동도 했죠. 수업은 안 들어가도 편집실은 꼬박꼬박 갈 정도로 애정이 있어서 편집장도 하고 그랬어요. 그래도 선생님들 눈에는 불량학생이었죠. 제가 한 진짜 나쁜 짓은 담배를 피운 것밖에 없는데 말이에요.(웃음)”
  -출석 일수가 모자랄 정도였다는데, 학교에는 별 애착이 없었나 봐요.
  “어려서부터 제 꿈은 작가가 되는 거였고, 그러려면 대학을 국문과나 문창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절실하지는 않았어요. 대학에 가지 않아도 평생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면에서는 아주 긍정적이었죠.”
  -그럼에도 중앙대 영어학과에 갔는데, 어떻게 된 건가요.
  “고3이 되고 나니까, 담임선생님께서 딱 한마디 하더라고요.  “네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대학은 없다.” 물론 전 그래도 괜찮다고 했어요. 그렇지만 대입시험 한 번은 봐야 할 것 같아서, 집에서 제일 가까운 학교에 지원하겠다고 했죠. 서울대요.(웃음) 그랬더니 네가 비록 내신은 별로지만 근래 모의고사 점수는 괜찮으니, 이왕이면 가능성 있게 중앙대 안성을 넣으라고 조언하셨어요.”
  -그 조언을 따른 건가요.
  “중앙대 안성이라면 문예창작학과가 있는 곳이니까 동의했어요. 그때는 가고 싶은 학과를 2지망까지 쓸 수 있었는데, 1지망은 당연히 문예창작학과를 쓰고 2지망은 당시 가장 높은 커트라인을 자랑하던 영어학과를 썼죠. 붙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그랬는데 당시 시험이 변별력이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어렵게 나와 버려서, 잘 찍은 제가 운 좋게 합격하게 됐죠. 문예창작학과 커트라인이 확 올라가는 바람에, 2지망이었던 영어학과에 가게 됐지만요.”
  -뜻밖의 결과였으니, 주변에서도 깜짝 놀랐을 것 같아요.
  “학교에서 화제가 됐어요. 쟤가 어떻게 붙었을까 하고요. 쟤네 부모님이 학교에 버스를 사줬다더라, 커닝을 했다더라 등등 각종 소문이 돌았죠. 근데 저는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거든요. 만약 떨어졌다면, 전 아마 원래 뜻대로 대학에 가지 않았을 거예요.”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입학했는데, 들어가서는 적응을 잘 했나요.
  “입학식 전에 다쳐버려서 학기 초를 병원에서 보내게 됐어요. 퇴원했을 때는 동기들이 이미 패가 갈려 있는 상태였고, 자기들끼리 몰려다니고 있었죠. 저는 밥 먹을 친구가 없어서 캠퍼스를 헤매고 다녔어요. 그런데 어떤 애가 다가오더니 같이 밥 먹을래?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동아리 하나를 추천해주는데, 순간 거기 가면 이제 혼자 밥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때부터 생각지 못한 연극동아리 ‘세대’활동을 하게 됐고, 비로소 학교에 적응하기 시작했죠.”
  -직접 연기도 하셨나요.
  “아니요, 연기는 한 번밖에 하지 않았어요. 주로 음향과 극본을 담당했죠. 제가 쓴 대본으로 창작극도 올려봤고요.”
  -동아리에 애착이 강하다고 들었어요. 그러면 학과생활은 자연스레 뒷전이 되지 않던가요.
  “입학한 해에 명지대의 강경대라는 친구가 전경에게 맞아 죽는 사건이 있었어요. 그걸 시작으로 우리 세대는 운동권이든 아니든 간에 대부분의 시간을 거리에서 보냈죠. 때문에 특별한 학과 생활이라는 게 없었어요. 그냥 서로 바빴어요. 학점을 챙길 겨를이란 게 없었어요.”
  -고등학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성적을 유지했다는 건가요.
  “어차피 제 꿈은 소설가가 되는 거였고, 안빈낙도적인 삶을 사는 거였으니까요.(웃음) 취직해서 직장인으로 살겠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한 적이 없어요. 직장에서 일하다가 대출 받아 집을 사고, 빚을 갚기 위해 또 노력하는 삶은 정말로 살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재학 내내 글을 열심히 썼고 신춘문예 및 문학상에 열심히 도전했어요.”

▲ 작업실에서 집필 중인 박상연씨.

  수없는 투고 끝에 그는 출판사 민음사를 통해 등단에 성공한다. 그러나 당장 생계를 챙기기에도 벅찬 인세와, 민음사가 절 이름인 줄 아는 주변 사람들은 그가 꿔왔던 환상을 깨끗하게 없애버린다. 생각과는 너무나 달랐던 등단 후 일상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뜻밖에도 영화계의 러브콜이 그의 잠잠한 일상을 흔든다.
  -영화에 발을 들일 것을 스스로도 예상하고 있었나요.
  “아니요, 저는 그냥 소설만 쓰고 살 줄 알았고, 그럴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침 한 영화사의 대표에게서 제 소설을 영화화하고 싶다는 전화가 걸려온 거예요. 생계가 급할 때라서 제의를 냉큼 승낙하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앞으로의 인생이 짐작하지 못한 방향으로 꼬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죠.”
  -그 제의가 큰 영향을 끼쳤다는 말인가요.
  “처음엔 그냥 원작을 사고 싶다는 정도로만 이해했어요. 그런데 막상 허락하고 보니 자꾸만 회의를 해야 한다며 저를 부르는 거예요. 시나리오를 써볼 생각은 없냐고도 물어보고, 영화화할 때는 소설의 어떤 부분을 강조하는 게 더 좋을지도 물어보고 그랬죠. 그렇게 소개받은 박찬욱 감독과 함께 얘기를 하다 보니까 처음엔 귀찮게 느껴졌던 것이 점점 재밌어지기 시작했어요. 사실 그동안 소설을 쓰면서 많이 외로웠거든요. 친구는 많은데 동료는 없는 삶을 살겠구나, 하고요. 그런데 그때 둘도 없는 동료를 얻은 것 같았어요.”
  -그렇게 완성된 영화가 <공동경비구역 JSA>였죠. 첫 작품인데 크게 성공할 거라는 자신감 같은 게 있었나요.
  “될 리가 없는 영화라고 생각했죠. 당시 트렌드였던 멜로도 아니었고, 사랑이나 연애 얘기도 나오지 않는데다, 군대 이야기잖아요. 게다가 배역도 지금 보면 화려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형편없었어요. 주요 인물이었던 송강호씨는 <넘버3>로 떴지만 인기를 이어가지 못하고 있었고 이병헌씨와 이영애씨는 그냥 드라마배우였으니까요.”
  -막상 개봉하니 엄청나게 흥행 했잖아요. 그때를 회상해 보자면요.
  “개봉 당일 다 함께 서울극장에 나갔는데, 영화 시작까지 한두 시간 정도 남았는데도 이미 표가 다 매진돼 있는 거예요. 그때 누군가가 “작가님, 역사가 바뀌었어요. <타이타닉>을 깼어요”라고 말했고, 이병헌씨가 “그동안 제가 출연했던 영화의 모든 관객 수를 합친 것보다 이 영화의 오늘 하루 관객 수가 더 많아요”라고 말했고, 박찬욱 감독이 “저도 마찬가집니다”라고 말했죠.(웃음)”
  -그 후로 본격적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건가요.
  “아니요, 7년간의 공백이 있어요.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한가하고 행복했던 시기예요. 원작소설이 일본에서 굉장히 많이 팔렸고, 아직 IMF여파가 가시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저는 큰 돈을 벌게 됐거든요. 그래서 신나게 놀았죠. 그 기간 동안 저와 사귄 여자들은 전부 행복했어요. 돈 많은 남자는 시간이 없고 시간 많은 남자는 돈이 없기 마련인데, 저는 둘 다 있었거든요.(웃음) 그러다가 마침내 돈이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에야 저는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게 영화였고 또 드라마였어요.”
  -대부분의 드라마를 함께 집필한 김영현씨를 만난 것이 그 무렵인가요.
  “훨씬 전에 만나서 친해졌죠. 첫 영화가 개봉하고 얼마 안 됐을 때 만났어요. 당시 무명이었던 김영현씨가 <대장금>을 집필할 때 함께 했어요. 그리고 그때의 인연으로 몇 년 후, 함께 드라마를 만들게 됐죠.”

▲ 드라마 ‘뿌리깊은나무’ 대본.

  생활 패턴이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한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물론 순탄치 않았다. 그들은 새벽 여섯 시에 잠들어 낮 두 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수면 패턴까지 맞춘다. 깨어있는 동안은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며 의견을 나누고, 이야기가 정리되는 즉시 딱 반으로 나눠 본격적인 집필에 들어간다.
  -첫 작품이 <히트>였죠. 제목만큼이나 기대가 컸을 것 같은데요.
 “그때 당시 제가 알고 있던 드라마 작가가 딱 둘 있었어요. 하나는 <허준>을 썼던 최완규씨고, 다른 하나는 <대장금>을 쓴, 같이 작업하고 있는 김영현씨였죠. 그 사람들을 보면서 저는 드라마 시청률이 당연히 50% 정도 나온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첫 작품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고요.”
  -당시 김수현씨의 <내 남자의 여자>가 동 시간대에 방송되고 있었죠. 엄청난 경쟁자를 만나 당황스러웠을 것 같아요.
  “말하자면 드라마의 신과 붙은 거죠. 덕분에 시청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졌어요. 그래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어요. 이야기를 어떻게 끊어 가는지, 어떤 식으로 기대감을 증폭시키는지 같은 것들이요.”
  -그 후로 쓴 <선덕여왕>이나 <뿌리 깊은 나무>같은 역사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 
  “쓸 때마다 각 시대에 관련된 역사책을 어마어마하게 주문해서 읽었어요. 저는 정말 공부 싫어했는데, 그래서 글을 쓰겠다고 했는데 막상 되고 보니까 공부할 게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어요. 그 힘들다는 고3 때보다 더 피곤한 거 같아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니까, 사실과 다른 부분은 역사 전공하시는 분들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하지 않았나요. 
  “그런 경우가 굉장히 많았어요. 그런데 저는 그게 오히려 낫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역사와 다른 부분을 계속해서 만드는데, 아무도 거짓말이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그걸 보는 사람들이 진짜 역사가 맞는가 보더라고 믿어버리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현대극과 사극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계시는데 두 장르의 가장 큰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핸드폰이요. 핸드폰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의 작법과 스토리는 굉장히 달라요. 뿐만 아니라 핸드폰으로 대표되는 현대문명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등장인물은 갑자기 죽을 수 없어요. 죽으려면 복선이 필요해요. 전쟁에 나가든지, 병에 걸리든지 그래야 해요. 그런데 현대문명이 발달하고 자동차가 발명되면서 등장인물은 언제라도 갑자기 죽을 수 있는 상황이 된 거죠.”
  -많은 작품을 썼는데, 그 소재는 다 어디서 가져오시나요.
  “세상을 향해 안테나를 열고 사는 거죠. 책도 보고, 퀴즈도 풀고 그러죠. 그러면 어느 순간 반짝하고 떠오르는 것이 있어요. 어디서 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순간적으로 찾아오는 아이디어가 있는 거죠.”
  -소설도 쓰고 드라마도 쓰고 영화도 쓰잖아요. 진짜로 쓰고 싶은 건 뭔가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소설로 돌아가 저만의 삼국지를 쓰는 것이 꿈이었어요. 이문열씨도 장정일씨도 황석영씨도 모두 자신만의 삼국지를 썼잖아요. 그래서 저도 박상연의 삼국지를 써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직업적 사춘기가 온 것 같아요. 자꾸 회의감이 들어요.”
  -회의감이라니요?
  “몇 년 전에 어떤 피디님 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장례식에 간 적이 있어요. 그런데 정작 피디님은 안 보이는 거예요. 알고 보니 촬영 때문에 못 온 거더라고요. 그때 그 상황이 이해가 가면서도 이해가 안 됐어요. 감독, 작가, 배우는 인력을 구하는 게 대체 불가능 하고 바쁜 것도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적인 도리도 못하고 사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동안 있었던 일을 돌아보면서 참 복잡한 기분이었겠어요.
  “웹툰 중에 좬미생좭이라는 게 있어요. 거기에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이라는 말이 나와요. 바둑에 목숨 거는 사람들을 보면 그게 뭐라고 그러는지 이해가 안 되면서도, 존경스러울 때가 있잖아요. 저도 ‘그래봤자 드라마, 그래도 드라마’인 것 같아요. 저는 작가고, 글에 제 모든 것을 걸고 있고, 그만큼 노력도 많이 해왔고 또 할 거지만 때때로 힘들고 지쳐요. 그때마다 이게 뭐라고 이러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드라마니까 제가 이러고 있는 거거든요.”


대학을 안 가도 그만
취직도 안 해도 그만이었다

소설 쓰는 데
뭐가 필요한가 싶었다

▲ 역사책이 가득한 책장 앞에 서 있는 박상연씨.

소설 이문열, 영화 박찬욱, 드라마 김영현 나를 이끈 사람들
  소설을 쓰다가 영화를 접했고, 그러다가 드라마를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박상연씨에게는 인생의 각 순간마다 새 영역으로의 길을 열어준 사람이 있었다.
  소설은 이문열씨였다. 이문열씨는 당시 유명한 문학상이었던 ‘오늘의 작가상’ 심사위원으로 있다가 박상연씨의 소설을 인상적으로 보고 전화를 건다. “박상연씨 되십니까? 전 소설 쓰는 이문열입니다.” 이문열씨는 소설 잘 읽었다, 아마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는 말을 전한다. 그러나 다른 심사위원들의 반대로 박상연씨는 등단하지 못하고, 그 후 이문열씨의 추천을 받아 비로소 작가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영화는 박찬욱씨였다. 박찬욱씨는 박상연씨의 소설을 인상적으로 보고 영화화 제의를 한다. 그러나 영화라는 장르에 별 관심이 없던 박상연씨는 별 의미 없이 승낙하고 의욕 없는 토론을 이어나가게 된다. 그러나 점점 즐거움을 느낀다. 재미를 느끼고,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다는 의욕까지 느끼게 된다.
  드라마는 김영현씨였다. 지인들의 만남에서 우연히 마주쳐, 함께 부산국제영화제를 관람하고 친분을 쌓아가게 된다. 당시 <공동경비구역 JSA>로 큰 성공을 거뒀던 박상연씨와 몇 년 후 <대장금>으로 히트를 쳤던 김영현씨는 환상의 콤비로 쓰는 작품마다 인기몰이를 해간다. 두 사람이 찢어져서 이른바 ‘특급 작가’가 둘이 되길 바란다는 말이 떠돌 정도다.

▲ 작품 포스터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박상연씨.

당신에게 중앙대란?

  “행운이다. 운이 따르지 않았더라면 가지 못했을 곳이다. 운이 따라서 입학할 수 있었고, 연극 동아리에도 들어갈 수 있었고, 사회에 관심을 갖고 독서토론모임도 이끌어갈 수 있었다. 이 과정이 없었더라면 나는 전혀 다른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을 거다. 여전히 글은 썼겠지만 어떤 글을 썼을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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