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를 침대에 결박한 후 침대길이에 맞춰 고통 속에 죽게 만들었다는 프로테스크신화는, 오늘날 대학 강의실에까지 ‘경쟁의 잣대’만을 들이대는 신자유주의적 풍경을 소묘하는 적절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대학사회의 음울한 단면은 대학 서열화 공식에서 절대화된다. 올킬을 외치며 속도경쟁으로 치닫는 수강신청, 콩나물시루 같은 강의실, 학점루팡이 휩쓸고 간 상대평가의 비정한 현실, 각종 어학점수에 자격증에 자원봉사에 해외연수까지 쓸어담아야 하는 스펙관리, 반값등록금 허언에 어이상실한 채 FM 장학금, 국장에, 학장을 기웃거려야 하는 등록금 앵벌이, 실업예정자로 예약해 둔 4학년 9학기는 찰러리맨(Child+ Salaryman)으로 가는 전형적인 코스이기도 하다. 
 

  그러나, 단연코 이래서는 안 된다. 
 

  대학 시절은 때로는 당돌하게 좌충우돌하며 객기로 세상에 종주먹질 해대며 개개보기도 하는 도전과 창발로 가득한 아름다운 시절이어야 한다. 지식인으로서 대학생은 실패와 좌절을 두려워 말고, 도전과 용기, 경험과 성취라는 형형색색의 크레파스로 텅 빈 도화지를 가득 채워나갈 시기이다. 남들이 이미 간 길 보다 가지 않은 길에 눈길을 돌려보아야 한다. 술도, 독서도, 토론도, 친구도, 공부도, 운동도, 취미생활이든 뭐든, 하나라도 붙들고 미칠정도로 오타쿠가 되고 마니아가 되어보아야 한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감으로 내 청춘을 ‘본방 사수’해야 한다.
 

  대학은 자기가 앞으로 살아 나아갈 방향을 잡아나가는 수련 기간이자 연마의 장(場)이지, 취업을 위해 맞춤 스펙을 준비하는 직업 훈련원이 아니다. 대학의 사회적 임무는 올바른 지식인의 육성이며, 지식인의 역할은 기존 질서에 대한 치열하고 비판적인 이론적 실천이자, 동시에 사회를 정의롭게 변혁시키는 것이다. 정의롭다는 것은 강자보다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것이며, 개인의 이기심보다는 공동체의 본분을 앞세우고, 경쟁보다는 연대에, 불의에는 철저한 저항으로 맞서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기준 자체에 의문을 제기해 보자. 학점, 스펙, 취업의 대열에서 허덕이지만 말고, 경쟁과 차별, 서열과 평가에서 내 인생을 건져보자. 기존의 주어진 사회적 ‘잣대‘에 나를 맞추려만 들지 말고, 내 속에 숨어있는 재능과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싱그러운 봄날에 무거운 이야기를 한 듯싶어, 기분전환을 위해 프로테스크의 뒷이야기를 다시 음미해 본다. 지나는 길나그네를 괴롭혀서 악명이 자자했던 프로테스크는, 어느 날 마침 지나가던 테세우스를 초대해 침대에 맞추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오히려 테세우스에 의해 침대의 크기에 맞추어 목이 잘리는 징치를 당한다. 현실에 대한 전복적 사유는 상상만으로도 발랄하고 통쾌하고 즐겁다.


김병조 강사 교양학부대학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