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올바르게 사는 것일까? 법대로 살면 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멋대로 살면 되는지. 그렇지만 누구라도 즐겁고, 행복하고, 순리대로 살자는 것에 대해서는 커다란 이의가 없을 것 같다.
 

  장면 1 : 어렸을 때 동네 어른들께서 말썽꾸러기 아이들을 훈육하기 위해 “너 아버지가 누구냐?”라고 묻곤 하셨다. 그런 꾸지람에 아이들은 함부로 행동하고, 함부로 욕설하는 것, 함부로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자신만의 잘못이 아니라 부모를 함께 욕되게 한다는 것을 알고서는 자신의 잘 못된 행동을 스스로 바로잡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자식을 낳고, 키우다 보니 행여 남에게 아픈 말이나 나쁜 짓을 더욱 삼가게 된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내가 나쁜 짓을 해서 그 업이 자식에게 돌아갈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어려서는 부모님에게 행여 누가 될까 봐, 나이 들어서는 자식에게 화가 미칠까 봐 평생을 근신하면서 조심스럽게 사는 것이 우리 소시민의 모습인 것이다.
 

  장면 2 : 올 3월에 제자 가운데 한 명이 지방 사립대학교의 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토요일 오후에 그 지역에 일이 있어 방문한 김에 제자연구실을 찾아가 보았다. 새로이 지어진 건물이라 깨끗하고 아담한 연구실에 들어섰을 때 봄이 와서도 그렇겠지만, 내가 가르친 제자가 교수가 되었다는 행복함에 몸도 마음도 연구실도 온통 따뜻하게 느껴졌다.
 

  무한 경쟁사회에서 내 옆에 있는 누군가가 잘되거나 칭찬을 받으면 괜스레 심술이 나고 시샘이 나기 마련인데 자식이나 제자에게만은 예외다. 제자가 나보다 잘나서 연구도 강의도 우수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학생들에게 인기절정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니 시샘은커녕 뿌듯함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장면 3 : 일전에 갑자기 안구건조증이 생겨 동네 안과의사 선생님께 그 원인을 물었더니 그분의 말씀이 걸작이었다. ‘당신 나이면 노안이 와야 정상인데 노안이 오지 않는 바람에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자꾸 들여다보니까 당연히 안구건조증이 왔다’라고. 이야기인즉슨 나이가 들어 노안이 오면 누가 맘에 안 드는 행동을 해도 못 본 척하고, 이명이 온 것은 다른 사람이 욕을 해도 못 들은 척하라는 신의 섭리라는 것이다. 눈을 혹사하지 말라는 충고와 함께 나이 들어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는 철학적 처방전을 받았다.
 

  이 세 가지 장면은 나만의 특별한 예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우리네 삶의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인물과 능력은 출중하지만 인생에 작은 도리와 소소한 재미, 순응하는 긍정을 경험하지 못해 구설수에 휘말리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안구건조증이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치료되었다. 솔직하게 순응의 결과인지 아니면 때가 되어서 나았는지 아직도 잘 모른다. 그저 다행일 따름이다.


남영준 교수 문헌정보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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