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don't do good television, we do the News.'
 
지난해 7월, 한 50대 조선족 여성이 7년간 함께 살던 남편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숨졌습니다. 취재를 위해 들어간 집 안. 저는 반사적으로 가족 앨범을 찾았습니다. 한때나마 단란했던 가정의 모습이 비극을 더욱 슬프게 만들어 줄 거란 생각이 들었지요. 무엇보다 ‘방송뉴스는 그림’이라는 선배들의 지침을 충실히 이행하는 거라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좋은 TV를 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는 뉴스를 하려는 거다.’ 얼마 전 봤던 미국 드라마 ‘뉴스 룸(News Room)’에 나온 내용입니다. 원유 유출 사고와 관련해 폭발하는 장면을 뉴스 오프닝으로 쓰자는 주인공의 제안에 PD는 ‘그림이 뉴스가 될 수 없다’고 답한 것이지요. 화염이 치솟고, 건물이 무너진다고 해서 무조건 뉴스가 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한 커뮤니케이션 학자는 이런 현상을 ‘과장의 정상화’라 칭했습니다. 세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우리의 언어, 특히 언론의 언어가 과장법으로 충만해진다는 의미이지요.
 
  ‘살인사건이란 ‘사실’을 다루는데 가족사진은 관심을 끌기 위한 자극적인 포장은 아닐까. 무엇보다 사진 속 다른 가족들은 2차 피해를 보는 건 아닌가.’ 살인사건 현장에 갔을 때 그 어떤 고민도 하지 않았음을 고백합니다. 좀 더 재미있는 기사를 쓰기 위해, 좀 더 관심 끄는 기사를 쓰기 위해 ‘살인 이후 다른 누군가의 피해’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음을 반성합니다.
 
  돌이켜보면 기자는 일상적으로, 또 숙명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몰래카메라, 위장 취업 등 비윤리적인 취재는 어느 정도까지 용인해야 하는지. 사회학의 유일한 과제라고도 불리는 ‘자살’은 언론이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많은 사람들이 보는 뉴스, 곧 시청률이나 구독률이 높은 기사가 좋은 건지 아니면 많은 관심은 못 받더라도 사회적 의미를 담는 것이 좋은 뉴스인지. 그렇다면 도대체 뉴스가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늘 고민해야 하는 겁니다.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부러운 게 참 많았습니다. 정의를 다루는 미국의 역사적, 합리적 논의에 놀랐고, 신문, 책, 학교 등에서 정의를 고민할 수 있는 그들의 열린 공간이 부러웠습니다. 정의를 부르짖는 기자로 생활하고 있지만 정의를 고민한 적이 몇 번이나 되는지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어쩌면 뉴스의 ‘정의(定義)’도 ‘정의(正義)’를 고민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몰상식과 비리와 부패를 고발하기 위해 어떤 게 올바른 것인지를 꾸준히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기자의 고민만큼이나 사회로 나가는 대학생의 고민도 간단치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의 고민이 각자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물론 우리 사회의 훗날을 결정합니다. 저는 제가 하는 고민이 분명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고민을 하고 계신가요.      
 장훈경 SBS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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