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을 놓아야 할 순간
  • 계민경 기자
  • 승인 2013.03.31 03: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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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짐 꼭대기에 올라선 기분이다. 손을 놓는 순간 모랫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것 같아서 내려오지도 못한 채 끙끙 앓고만 있는 어린아이, 3월의 나는 아슬아슬하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둘째 치더라도 그것을 ‘전달’하는 데는 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함을 몸소 느끼고 있다. 온통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단어로 도배된 전공 서적도 답을 주지는 못한다. 지면에 박힌 잉크는 말라붙은 채 죽어있을 뿐이다.  


 나를 꼭대기로 내몬 건 프랑스 혁명의 거대한 핏빛 물결이었다. 어려운 학술을 예술이라는 코드와 접목해 말랑말랑하게 풀어가자는 <예술에서 학술을 읽다>의 취지대로 한창 뜨거웠던 영화 ‘레미제라블’을 선택했다.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프랑스 대혁명이 아니라는 사실은 충분히 매력적인 주제였다. 영화를 보고 도서관에서 프랑스 혁명에 관한 책을 뒤지는 것까지는 좋았다. 역사에 문외한이라 공부가 어려웠지만, 레미제라블에서 본 청년들의 강렬한 인상에 사로잡혀 이를 지면에 온전히 싣고 싶었다. 프랑스 혁명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나선 거침없이 초고를 써내려갔다. 그러나 초고를 본 부장님의 반응은 ‘갸우뚱’이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하지만 이상하다는 일차원적인 사고에서 그칠 뿐 도무지 어디가 잘못됐는지 알 수 없었다. 영화 배경이 프랑스 대혁명이 아니라면 대혁명은 왜 일어났는지, 혁명의 과정은 어땠는지에 관한 설명이 꼭 필요했다. 방대한 설명이 어려운 것 같아 단어를 축약해서 고쳐 썼다. 하지만 여전히 기사는 불편했다. 친구에게 글을 보여줬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강연을 듣는 기분이다’였다. 학교에서도 매일같이 수동적으로 듣는데 기사에서까지 지식을 들어야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독자를 가르치려 들고 있었다. 깜짝 놀라 들여다본 내 기사에는 차가운 지식들이 한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총재정부니 공포정치니 하는 단어들은 아무런 설명 없이 문장을 비집고 튀어나와 있었다. 즉, 나는 역사의 ‘기계적’ 단어를 억지로 기사 속에 구겨 넣고 있었던 것이다. 귀를 꽉 막은 채 독자들에게만 이해하라며 강요한 꼴이다. 독자의 시선을 이해하려 애쓰며 다시 글을 고치기 시작했다. 어려운 교과서적 단어보다는 역사의 흐름을 따라가도록 방향을 바꿨다. 혁명사를 배우지 않는 공대생도 충분히 프랑스 혁명과 함께 흘러갈 수 있도록. 몇 문단을 통째로 갈아엎고 나서야 기사는 비로소 ‘커뮤니케이션’이 됐다. 


 독자들은 심어주는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바보가 아니다. 죽은 커뮤니케이션의 시대는 끝났다. 흔히 말하는 쌍방향적 커뮤니케이션을 나는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었지 실천하지 못한 것이다. 내가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는 지식을 모두 전달해야겠다는 내 오만이었다. 어떻게 전달해야 커뮤니케이션이 될지를 생각해야 하는 지금, 오만을 놓아줘야 할 때다. 정글짐 꼭대기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보다 손을 놓고 일어서 두 팔을 벌려 균형을 잡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것을 나는 잊고 있었다.


 <레미제라블에서 프랑스 혁명을 읽다>는 수많은 고쳐 쓰기 후 지면을 통해 기사가 됐다. 사실 레미제라블 후에도 여전히 나는 아슬아슬하다. 다만 확실한 건 4월의 나는 ‘균형 잡는’ 단계일 것이라는 기대다. 지식과 그것의 전달은 언제나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둘 사이의 균형을 잡는 나는, 학술부 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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