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대하는 신문의 보도사진. 잡지나 카다로그에서 볼 수 있는 패션사진.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찍는 기념사진. 이렇듯 사진은 우리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대중적이고 친숙한 예술이다. 하지만 이런 사진들을 찍는 사람들의 시선은 어떠할까 생각해보자. 보도사진은 데스크의 지침에 따라 몇십 장의 사진 중에 선택되고, 패션사진은 세련되고 감각적인 이미지로 피사체의 이면을 숨기고 우리들의 물욕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형상화된다. 그렇다면 혹시 이런 사진들을 찍는데 있어서 어떤 정형화된 틀이나 질서가 이들을 통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 8월 27일부터 9월 15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1999서울사진대전 ‘사진은 우리를 바라본다’는 이러한 사진의 특성에 대한 기존관념을 부수기 위한 국내 최고 사진작가와 실험성 있는 신예작가들이 펼친 장이었다. △’너무나 멀리, 가까이 있는 카메라들’ △’매력은 당신을 주체로 호명한다’ △’가장 친한 사람이 너를 배반할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인테리어와 익스테리어’ △’여기서 살아나갈 자는 누구인가’라는 5가지 주제아래 열린 이번 전시회는 사진에서 보여지는 ‘타자성’에 대한 논의를 대중에게 쉽게 설명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기서 말하는 사진의 타자성이란 ‘자기의 신체가 타인의 신체를 통해 그 정체성이 확인되는 것’, 즉 내가 무엇을 보고 있을 때 나 자신도 항상 보여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감시카메라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된다. 카메라를 통해 사람이 ‘보지만’ 사실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카메라’일 따름이다. 단지 사람은 카메라가 잘 작동되는지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바라보는’ 주체가 동시에 ‘바라보여지는’ 객체가 되는 셈이다. 결국 전시회의 주제처럼 ‘사진이 우리를 바라본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와 같은 사진에 대한 서로 다른 가능성들은 우리가 사진에 대해 가진 생각들에 대해 다른 측면에서 사고할 것을 요구한다. 사진이 가지고 있는 여러 함의와 관점의 다양성. 이처럼 사진은 우리에게 ‘바라 보여지는 개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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