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

이태현

국어국문학과 74학번

중앙대 홍보실장

 

 

의혈 달래던 임영신 박사 지금도 잊을 수 없어

  70년대 캠퍼스의 봄은 우울했다. 당시 긴급조치라는 올가미가 시대의 지식인층을 대상으로 마구 휘두를 수 있는 전가의 보도였기에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으나 뜨거운 피를 더욱 뜨겁게 만드는 기폭제 역할도 했다. 툭 하면 휴강에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갑자기 안 보이는 학우의 모습을 걱정하며 흉흉한 소문만 무성했고, 교수님들은 제자들의 희생을 막고 의혈을 달래느라 수업 못지 않게 노심초사 하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새 봄에는 새내기 환영의 낭만도 있었고, 선후배 간의 뜨거운 정도 오갔다. 지금은 체육관과 건물이 들어선 자리에 대운동장이 있었고 체육대회를 통한 새내기 환영도 많았다. 아예 지름이 1m가 넘는 거대하고 넙적한 자주색 플라스틱 통에 막걸리를 넘치도록 담아 놓고 오며 가며 후배들에게 한 바가지씩 퍼주는 선배의 강요(?)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알코올에 약한 나도 몇 잔을 마셨는지 체육대회가 끝나고 친구들 부축을 받으며 하숙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당시 기와지붕이 있던 정문 한가운데서 엄청난 토사물을 쏟아냈던, 지우고 싶은 기억도 있다.
 

  새학기가 시작되면 으레 담장 밖으로 닭장 차(당시 철망이 둘러진 경찰차를 그렇게 불렀음)가 대부분 대기하고 있었고, 누군가의 선창으로 스크럼을 짜면 이내 캠퍼스는 최루탄 가스로 자욱해졌으며, 당시 신제품(?)이라던 ‘지*탄’(땅에 떨어지면 급하게 바람 빠지는 풍선처럼 좌충우돌 굴러다니며 가스를 토해내는 최루탄의 일종)을 이리저리 피하며 전우애(?)를 다지기도 했다. 아직도 뇌리에 생생한 것은 스크럼을 짜서 구호를 외치며 청룡연못 가를 돌아 정문을 나서려는 학생들 앞을 가로막고 양 팔을 크게 벌린 채 ‘내 아들 딸들아, 나를 밟고 지나가라’고 하시던, 평생 잊지 못할 임영신 박사님의 모습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예비고사에 피말리다 가까스로 캠퍼스에 들어온 새내기에게 70년대 캠퍼스의 봄은 그래서 암울하기만 했다. 마치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하지만 철커덩 거리는 굉음과 함께 꾸준히 돌아가는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멈추지 않는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 21세기 이후에는 다시 올 수도 다시 볼 수도 없는,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장면들이다.
 

  그때 이후 40살이나 더 먹은 캠퍼스의 봄은 화려하다. 스카이라인을 다 바꿔놓은 건물들, 밑둥이 굵을 대로 굵어진 오래된 나무들, 저마다 향기와 자태를 뽐내는 온갖 화초들, 현대화된 강의실과 시설들… 그러나 무엇보다 이제 막 성인이 되어 풋풋함이 아름다운 신입생들의 발랄한 모습 때문에 캠퍼스는 살아 숨쉬고 있다. 점심시간이 되면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걷기도 힘들지만 비좁기 짝이 없는 정문 앞 인도에서 어깨를 부딪히는 수많은 학생들의 밝은 모습들이 싱싱하기만 하다.

 

 

1980


방재석
문예창작학과 80학번
안성캠 학생지원처장


 

 

짧았던 서울의 봄

나는 태어나서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대통령을 한 명뿐이 보지 못했다. 우리세대에게 박정희란 고유명사와 대통령이란 일반명사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는 고유명사와 일반명사의 합성어가 아니라 고유명사인 동시에 일반명사였다. 박정희가 아닌 다른 고유명사를 대통령이란 일반명사와 연결시켜 상상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불경처럼 여겨졌다.

대학입시를 눈앞에 둔 10월 어느 날 등굣길에서 ‘유고’라는 낯선 단어를 접했다. 그것이 죽음을 뜻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온 나라가 ‘멘붕’이었지만 교실은 금방 평온을 되찾았다. 고 2때까지 영어시간에 소설을 읽고 수학시간에 시를 쓰던 나도 대학은 가야겠기에 예비고사 문제집을 붙들고 있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장충체육관에 모여 새 대통령을 뽑고, 참모총장의 관저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개헌논쟁이 계속되는 동안 나는 대입 예비고사를 보고 대학교에 원서를 내고 시험을 봤다.

그해 내가 지원한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의 경쟁률은 기록적이었다. 대학 원서를 단 한 곳에만 쓸 수 있었던 시절 16.7:1은 굉장한 것이었다. 떨어지면 후기 대학에 한 번 더 시험을 볼 수 있었지만 갈만한 학과는 거의 없었다.
본고사 국어 시험문제와 실기시험 시제를 지금도 기억한다. 국어시험의 지문으로 춘향전이 나왔는데 ‘이도령’의 이름을 묻는 문제가 있었다. 흑석동 캠퍼스의 중앙도서관에서 본고사를 보고 나오면서 같은 과에 응시한 고등학교 친구에게 나는 호기를 부렸다. ‘이도령 이름을 쓰라는 걸 대학교 본고사 문제라고 내냐?’ 친구가 되물었다. ‘뭐라고 썼냐?’ 나는 대답했다. ‘이방원도 모르는 애가 누가 있냐.’ 한바탕 폭소를 터뜨린 녀석이 말했다. ‘넌 떨어졌어!’ 그러나 중앙대 문창과의 인재를 보는 안목은 뛰어났다. 대운동장에 길게 세워놓은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은 있고 그 친구의 이름은 없었다. 소설을 잘 썼던 그 친구는 산문을, 시를 썼던 나는 운문을 선택해서 실기시험을 봤었다. 시제로 나왔던 ‘창’에 지금도 감사한다.

흑석동 캠퍼스엔 하루가 멀다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우리학교가 영등포와 여의도를 거쳐 시청 앞까지 진출했던 5월에 ‘서울의 봄’은 절정이었다. 그러나 봄은 길지 않았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목총을 들고 군사훈련을 받았던 우리는 대학에 와서도 매주 교련 교육을 받았다. 지금 법학관과 교수연구동이 들어서 있는 자리에 우리가 ‘만주벌판’으로 불렀던 연병장이 있었다. 교련 교과에는 1주일간의 학생군사학교 입교 훈련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동기들이 군사학교에 입교한 다음날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렸다. 우리는 군사학교에서 항의시위를 벌였고, 완전무장한 특전사 병력은 연병장을 에워싸고 포위망을 좁혀왔다. 주동자로 지목된 과대표들은 연행되었다. 보안대의 조사를 받고 있는 신입생들을 찾아온 이석희 총장님은 눈물을 흘리셨다. 존경하는 노철학자의 눈물 앞에서 우리 또한 울지 않을 수 없었다. 1980년, 속절없는 봄이었다.

 

 

1989


권경우
영어학과 89학번
한예종 강사

 

 

연애금지라더니…선배들은 몰래했다

  필자가 대학에 입학한 해는 1989년이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이  대학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1987년 시민항쟁 이후 민주주의를 회복한 것처럼 보였지만 대학은 그렇지 못했다. 갓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들은 화사하고 따뜻한 봄날의 추억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외부적 환경과 조건은 새내기들에게 어떤 의무를 요구했으며, 청춘이나 자유와 같은 낭만성은 거세된 채 ‘청년’으로서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주체로만 남아 있었다.
 

  내가 대학 입학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다양한 동아리 가입과 신입생 MT였다. 3월 한 달의 주말은 모조리 MT 일정으로 꽉 차 있었다. 집에서 잠을 자 본 적이 없었다. 대학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고 입학한 나로서는 새로운 공간, 새로운 사회, 새로운 사람이 너무 좋았다. 그 과정에서 내가 알지 못했던 사실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관계들이 ‘나’라는 존재 안으로 들어왔다. 많은 것들에 의문이 생겼고, 물음은 방황을 낳았다. 봄날의 기억은 그렇게 혼란과 망설임의 연속이었다.
 

  선배들은 노동자/농민으로 대변되는 ‘민중’을 이야기했고, ‘반미’와 ‘통일’을 강조했다. 미 제국주의의 커피와 콜라를 마시지 못하게 했으며, 맥주는 부르주아의 술이라며 소주와 막걸리를 추천했다. 그 중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동아리 내 연애금지’였다. 그것이 도대체 민중, 반미, 통일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선배들’은 남몰래 연애를 하고 있었다. 나처럼 말 잘 듣는 착하고 순진한 새내기들은 군대 다녀올 때까지도 연애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청춘을 돌려다오!
 

  캠퍼스의 봄은 개나리와 철쭉, 진달래, 목련이 피었다가 졌다. 봄꽃의 향기는 매캐한 최루가스와 더불어 우리의 후각을 어지럽히곤 했다. 대낮의 소란스러움으로 마비된 감각은 술집 뒷풀이에서 되살아났다. 나는 꽃 속에도, 화염병 속에도, 술집에도 어디에나 존재했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비틀거렸고 절룩거렸다. 혼란스러웠다. 그것은 불안과 달랐다. 미래의 할인을 통해 전달되는 막연한 불안감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충실한 반응이었다. 불행하다거나 고통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충만함에 가까웠다.
 

  그런 점에서 투명하고 확실한 미래를 설계해주는 이 시대는 얼마나 낯선가? 그래서 행복한가? 질문과 방황과 혼란이 사라지고 막연한 불안의 유령만 떠돌고 있는 대학 공간에서, 새내기들은 무엇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의 삶이 정말 그렇게 투명하고 확실한 것이라면 수많은 철학과 종교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치 주기적으로 투약해야 하는 프로포폴처럼 ‘희망’이라는 단어를 섭취할 것이 아니라, 의심과 방황에 친숙해져야 하지 않을까? 방황하고 흔들어라. 전공과 영어를 흔들고, 대학을 흔들고, 역사를 흔들고, 미래를 흔들어라. 어느 시인이 노래했듯이,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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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오승환
경영학부 98학번
LG생활건강 파트장

 

 

 

IMF와 함께 입학했다, 남자셋 여자셋은 없었다

입학식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쩌렁쩌렁한 앰프소리가 ‘법대와 경영대’ 건물(현 제2공학관)에 반사되어 퍼지지 않고 펀지볼 모양의 대운동장에서 계속 웅웅거렸다. 아직 풀리지 않은 완전히 풀리지 않은 이른 봄날인데, 각 학과/학부별로 종대로 도열해 있으려니 영 좀이 쑤셨다. 높으신 분들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 들리지 않고, 얼른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가수이자 영화배우였던 새내기 임창정을 촬영하러 온 기자들과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입학식장은 이내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침부터 멋내려고 당시 유행했던 더플코트로 신경 써서 입고 왔는데, 이게 뭐람.
 

  98년 대학생활은 과도기적인 모습이었다. 새로 도입된 학부제로 내가 소속된 학부의 한 학년은 무려 500명이었다. 6개반으로 흩어져서 강의를 들었는데 1학기때는 그나마 학교에서 강제로 수업일정이 짜여져서 나왔지만 2학기에 MS-DOS화면처럼 생긴 수강신청 시스템에 적응하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인터넷의 활용>이라는 교양수업을 들으면서 한메일에서 이메일 주소를 처음 만들었고, 선후배나 친구들에게 연락할 때는 삐삐가 보편적이었다. 지금은 공중전화를 찾아보기도 어렵지만 삐삐 음성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공중전화 줄서기는 으레 있는 일이었다. 지금은 누구나 하나씩 갖고 있는 휴대전화도 당시 부의 상징으로 치부되었다. 그리고 그 시기부터 대학등록금 인상이 매년 3~5%씩 진행되었다. 어려운 경제상황으로 대학생들이 주머니사정이 좋지 못해 맛없다던 학관식당은 항상 만원이었다. 소 판돈으로 대학보낸다는 말이 점차 옛말이 되어갔다.
 

  당시 <논스톱>이나 <남자셋 여자셋>과 같은 TV시트콤에서는 대학생활을 철없는 ‘놀자 대학생’으로 그리기 일쑤였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대기업들은 어려운 경제상황에도 불구하고 다른 연령대에 비해 줄지 않는 20대 초반 대학생의 구매력에 집중한 마케팅을 선보였다. 갈수록 대학문화와 일반대중문화의 경계가 모호해졌고, 90년대 초반부터 계속 제기되어온 대학문화위기론이 이제 어느 한쪽으로 기운 듯했다.
 

  사실 98년은 어지러운 한해였다. 정확히 내가 대학수능시험을 봤던 날, IMF구제금융을 받기로 당시 임창열 경제부총리와 미셸 캉드쉬 IMF총재가 서명을 했다. 그 후 석달 뒤,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그는 IMF식 경제정책을 충실히 이행했다. 동화-대동 같은 대형은행들이 퇴출 및 합병되고 대우그룹 같은 재벌들이 공중분해되었다. 금리는 20%까지 오르고 주가는 300선까지 밀렸다. 모라토리엄, 디폴트 같은 어려운 경제용어들이 신문지상에 흔하지 않게 오르내렸다.
 

  과거의 기억이란 오묘한 힘이 있어서 힘들고 어려웠던 사건들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버리고 한다. 그렇지만 그 ‘추억’들이 한 사람의 성장하는 데 커다란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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