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이번 학기 수강신청도 말끔하게 성공했다. 지인들의 수강신청 실패 소식이 들려올 때엔 나름의 수강신청 성공비법을 설파하기도 했었다. 5차 학기에 접어 들다보니 수강신청 실패보단 신청기간을 잊어버릴 만큼 둔감해져버렸다는 사실이 더 무서웠다.
 

  그만큼 익숙해졌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익숙해진 것은 수강신청 뿐만이 아니었다. 흑석의 북적거림도,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동아리 홍보부스도 더 이상 기자를 설레게 하지는 못했다. 핑계일지도 모르겠지만 설레지 않다보니 더 설레발을 떨었더랬다. 모두들 즐거워하는 3월의 어느 날, 나 혼자 설레지 않는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설레발치며 캠퍼스를 거닐었다. 아주 즐겁다는 듯이. 그러다가 후배 한 녀석을 만났다. 아주 우연하게도.
 

  학과 소식지를 만들고 있다는 후배 녀석이 대뜸 물었다. “선배는 우리 과에서 수강신청 할 때 어떤 부분이 제일 불편했어요?” 성공적으로 수강신청을 완료한 나에게 수강신청의 불편한 점이 무엇이냐 묻자 무척 당황스러웠다. 뭉뚱그려 대답하다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한 가지가 있었다. “강의실에 사람이 너무 많아. 심지어 내가 듣는 한 수업은 120명까지 수강하더라니까. 집중이 잘 안 돼.”
 

  120명이 수강한다는 소리에 놀란 후배는 재차 물었다. “다른 과는 더 심하네요? 우리 과도 90명인데” 기자는 뭘 그렇게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이 대답했다. “우리 과 정도면 양호한 거야.” 고개를 갸우뚱 하는 후배에게 나름 기자랍시고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얘기들을 쏟아냈다. 그러자 후배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수도 있겠다는 반응이었다. 한창 열변을 토하던 중 또 다른 후배가 나타나서 한 마디를 슬쩍 던졌다. “그런데 90명씩 듣는 수업이 당연한 건 아니잖아요.” 그 말 한마디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얼굴이 벌개지고 민망해져서 이만 가보겠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기자가 당연하게 생각한 것을 ‘당연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말은 참 무서웠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2년 동안 익숙해진 학교생활은 어느덧 ‘당연한 것’이 돼버렸다. 콩나물 강의실에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수업을 듣는 것이 당연해졌다. 수강생이 많아 교수님이 직접 출석을 부를 수 없어 전자출석을 도입했더니 교수님께서 학생 이름을 모르는 것도 당연해져 버린 것이다. 분명 어릴 적 기자가 그리던 대학생활과는 사뭇 다르다. 수업시간엔 자유로운 토론 분위기가 형성돼 우리들끼리 치열한 공론장을 만드리라 생각했다. 수업시간에 얼굴을 익힌 교수님, 동기들과 술 한 잔 기울이며 사회가 던져주는 이 시대의 고민들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적어도 과거엔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했다. 작금의 현실을 돌아보자니 우리 대학생들의 의식이 대학이라는 존재를 규정하진 못한 것 같다. 슬프게도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파악되질 않는다. 우리를 이렇게 만든 ‘대학 시스템’이 문제인가, 이러한 상황을 그 어떠한 비판의식 없이 받아들인 ‘우리들’의 문제인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이토록 어려울 줄은, 진정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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