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한 사교육 업체의 광고를 보았다. “흔들리지 마, 친구는 너의 공부를 대신해주지 않아”라는 문구가 포함된 그 광고. 노골적인 문구보다 나를 더 놀라게 했던 것은 광고를 접한 나 자신의 반응이었다. 우정보다 성적을 가치 있는 것으로 둘 때, 나는 즉각 의심하거나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의식적인 거부가 무색하게 신자유주의의 경쟁원리는 어느새 무의식에서부터 사람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었다.

『88만원 세대』가 세상에 나온 지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나빠지지 않은 이도 나아지진 않았을 것이다. 유행어는 정직하다. 경제적인 조건으로 말미암아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한 세대. ‘88만원 세대’의 시간이 가고 ‘삼포세대’의 시간이 왔다. 그나마 미련이 남아서일까? 우리는 여전히 ‘각개전투’ 중이다. 

  끊임없이 타인과 경쟁하고 살아남으라는 신자유주의의 ‘정언명령’은 우리 성장기 전반을 지배했다. 택시미터기의 말처럼 달리고 또 달렸다. 물론 우리 모두 거기에 어떤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해결할 수도 없는 그런 문제를 고민하느니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우는 게 ‘효율적’이지 않은가?

  미국의 어느 인디언 보호구역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막 부임한 백인 교사가 아이들에게 까다로운 시험 문제를 냈다. 특별히 어려운 문제를 냈다는 교사의 말에 인디언 아이들은 갑자기 책상을 가운데로 끌어당겨 한데 모여 앉기 시작했다. 교사는 부정행위는 안 된다고 아이들을 훈계했다. 그러자 인디언 아이들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교사에게 물었다. “저희는 지금껏 어려운 문제는 함께 힘을 합쳐야 해결할 수 있다고 배웠는데요?”

  분명 어려운 일이다. 정치, 경제, 문화가 얽혀 무엇이 문제인지 제대로 파악조차 하기 힘든 문제를 어렵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우리는 혼자서는 결코 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럴 때 인디언 아이들처럼 책상을 모아보면 어떨까? 생각의 단위를 확장하고 문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때, 어려운 문제는 비로소 다뤄볼 만한 문제가 된다.

  2011년에 있었던 ‘반값 등록금 운동’이 그 좋은 예이다. 비록 등록금을 실제 반값으로 낮추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결과 대학생, 나아가 청년문제가 심각하다는 여론을 조성할 수 있었다.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의 각계각층은 그제야 청년문제를 중요한 ‘사회문제’로 인식하였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진지하게 강구하기 시작했다. 만약 이전처럼 그저 개인의 문제로, 그래서 장학금을 타든, 아르바이트를 하든, 그것을 오로지 개인이 해결해야할 문제로 생각했다면 지금과 같은 미약하나마 한결 나아진 상황은 절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자. 닮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함께 하자. 고민을 나눌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 과 학회, 소모임, 동아리 등. 지금 보고 있는 <중대신문>도 좋고, <중앙문화>나<녹지>같은 자치언론도 좋다. 혹시 아는가? 누군가와 함께 하는 과정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절로 문제가 해결될지. 어쩌면 인디언 아이들처럼 충분히 함께 하지 못했던 게 문제가 지속된 원인은 아니었을까?

  적잖은 이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눈 붉은 ‘잠수함의 토끼들’은 도처에 있으니 말이다. 당신만큼이나 그들도 당신과 함께하길 원한다. 실은 그 어디쯤에서 이 글을 쓴 나 또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 속에서 우리의 마주침이 일으킬 환한 불꽃을 기대하며, 나는 대학에서의 다섯 번째 봄을 맞이하고 있다.

 

 

김규백(정치외교학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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