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 우리에게 ‘장발장’이라는 제목으로 더 많이 알려진 빅토르 위고의 소설. 최근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형식의 영화가 크게 흥행하면서 다시금 주목을 받게 되었다. ‘레미제라블’에서는 ‘장발장’과 ‘자베르’라는 두 인물의 갈등이 나타난다. 두 인물에 대해 독자인 우리는 보통 장발장은 선한 인물, 자베르는 악한 인물의 공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베르를 단순히 악한 인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장발장이라는 주인공의 삶에 주안점을 두고 전반적인 스토리를 바라보면 자베르는 분명 좋은 캐릭터는 아니다. 가난하지만 선량한 장발장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생계형 절도범이 되었는데, 당시의 무자비한 법의 기준을 적용해 장발장이 죄가를 치르게 하고, 그 이후의 삶까지도 철저히 감시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자베르는 자신이 선이라 믿는 사회 정의를 수호하고자 했던 강한 신념을 가진 캐릭터이다. 당시 프랑스는 공화정과 왕정을 오가는 불안정한 사회였기 때문에 보통의 경우보다 더욱 강력한 치안 유지가 요구되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절도범을 강력하게 처벌하고, 재범 방지를 위해 절도범을 철저히 감시하는 것은 경찰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어떤 갈등 상황이 악한 누군가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많은 동화를 읽기도 하고 듣기도 하며 자라왔는데, 대부분의 동화들에서 권선징악의 구도가 반복되다 보니 성인이 되어서도 그 틀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된 결과이다. 앞서 언급한 ‘레미제라블’에서의 두 인물에 대한 관점도 그렇게 형성되었다고 생각한다. 원작 소설보다는 축약된 형태의 동화로 두 인물을 접하다 보니 우리 동화의 일반적인 권선징악의 프레임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그저 장발장은 선, 자베르는 악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강화된 권선징악의 프레임은 현실에서 많은 문제점을 발생시킨다. 은연중에 많은 문제들을 선과 악으로 규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어떤 문제에 대해 나와 다른 의견을 ‘다름’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틀림’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 정해진 절차와 방식을 동원해서 최종안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된다. 왜? 그건 악이니까.
 
  필자는 최근 우리 사회의 몇가지 쟁점에 대한 심각한 갈등 또한 이런 권선징악의 프레임에 영향 받은 바가 적지 않은 것으로 본다. 물론 이상의 내용들을 통해 협력하여 공동선을 이뤄나가자는 등의 구태의연한 긍정론을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단순히 선과 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점에서 현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