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기를 즈음하여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사람들과 행사들이 가득하다. 제18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박근혜 정부가 출범했고, 우리 대학에서도 새 총장과 보직교수들이 임명되었다. 대학 졸업생들은 거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으며, 새내기들은 꿈과 기대를 품고 캠퍼스를 활보한다. 금연금주의 새해맹세에 이미 무릎을 꿇었거나 ‘혁명은 되지 않고 방만 바꾸어야’[김수영, 〈그 방을 생각하며〉] 했던 슬픈 사람들에게도 2013년 봄은 또 다른 시작의 계절일 것이다.


  때맞춰 출발하고 더 멀리 떠나기 위해 바투 매어야 할 신발 끈은 비판적인 시대정신이다. 두려워해야할 ‘시민’은 없고 뻔뻔한 ‘국격(國格)’만 내세우는 나라와 ‘제자와 스승’은 없고 ‘고객’과 ‘교육공급자’가 만나는 기업 대학의 수풀 속에서 길을 잃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높아가는 국가 품격에 반비례해서 국민들은 더 가난하고 애국주의의 희생자가 된다면, 상승하는 대학순위에 반비례해서 교수와 학생들이 서로 냉소적으로 고립된다면―우리가 숭배했던 세계관과 역사인식을 재점검해야할 시간이다.


  21세기 초국가적 경쟁시대의 대학에서 ‘낭만시대’는 갔다고 한다. 높은 등록금으로 생산되는 청년 백수와 끝없는 스펙 쌓기 경쟁에 지친 청춘들에게 대학은 더 이상 음주와 연애놀음의 비싼 장소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렇다. 7080학번 퇴폐청년들이 휴강하고, 데모하며, 길거리에서 노래하던 낡은 낭만시대는 갔다. ‘굶어 죽기에 딱 좋은’ 역사와 문학에 탐닉하는 것이 어리석은 낭만이라면, 주제넘은 나라걱정과 사회문제에 대한 ‘개똥철학’으로 밤새는 것이 시대착오적 낭만이라면, 그런 낭만시대는 정녕 대학에서 사라졌다. ‘닥치고 공부와 연구’라는 좌우도 없는 이데올로기에 떠밀려 한 때 ‘진리와 정의의 (낭만적인!) 전당’이었던 옛 대학은 ‘도라지 위스키’의 추억과 함께 구체제(앙시앵 레짐)의 유물이 된 것이다. 


  오늘 내딛는 첫 걸음이 ‘역사적으로’ 올바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냉철한 자기성찰과 뜨거운 연대감이다. 대학은 사회를 ‘준비’하는 취업시장의 인큐베이터인가, 또 다른 사회를 ‘모색’하는 변혁의 실험장인가? 우리가 배우고 익히며 교환하는 지식은 소비·응용되어야할 상품인가, 또 다른 현실을 벼리고 횡단하는 지렛대인가? 대학은 역사적 산물이며 동시에 역사적 주체라는 이중성격을 갖기 때문에 우리 선택은 어렵고도 모순적인 것처럼 보인다. 유감스럽지만 “모든 혁명은 배반당한 혁명”[마르쿠제]일지라도, 우리는 쫓겨 간 그 빈 방에서 다시 일어나 책을 읽고 또 다른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 한다. 소용없는 당신의 외로운 독서와 까마득한 망루에 올라 허공 속을 걷는 그대의 고독이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해야 하기 때문이다. 너와 나의 또 다른 시작은.

육영수 교수 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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