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필 : 계민경(광고홍보학과 1)
                「그곳에서 나비를 꿈꾸었다」
 
그곳에서 나비를 꿈꾸었다
 

 
 

아침 7시, 얼어붙은 귓바퀴를 장갑 낀 손으로 주물러가며 잰 걸음으로 15분의 거리를 걷고 나면 수상쩍은 까만 봉고차가 나를 싣고 털털거리며 달렸다. 도착지엔 베이지색의 낡아빠진 건물이 덩그러니 서있다. 얼어붙은 발을 유난스럽게 구르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무거운 철제문을 열면, 히터를 틀지 않아 아직 입김이 하얗게 번지는 실내가 보이고, 그래도 밖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하며 겉옷을 작업복으로 갈아입는다. 십분도 채 못 쉬고는 얼른 물통에 물을 채워 각자 위치로 분주히 움직인다. 곧 들리는 익숙한 기계음. 언 손 위에서 너덜거리는 목장갑. 빨간 고무 부분은 빠르면 이틀이면 다 닳아 못쓰게 되어버린다. 1월, 내가 일했던 신발 공장의 아침은 늘 그렇게 시작했다. 

 
수시 합격의 기쁨을 억지로 묻어두고 수능을 준비했고, 수능을 끝으로 교과서를 학교 폐휴지함에 구겨 넣으며 해방되었다 믿었었다. 3년간 간절히 소망했던 학교, 학과에 합격 통지서를 받았지만 그것은 해방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었다. 시험이라는 핑계로 미뤄두었던 학비, 생활비 등의 그놈, 돈과 맞닥뜨리게 되자 나는 그저 무력한 어린아이였다. 때문에 수능이 끝난 이틀 후 친구들과 놀러나가기는커녕 바로 과외를 시작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가난한 지방 촌사람이었던 나는 수능이라는 고교 생활의 끝과 동시에 덜 자란 날개로 둥지를 떠나야 했다. 첫 등록금은 대준다던 부모님의 말씀 속에 얼마나 오랜 고생이 묻어있는지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었다. 그 첫 등록금을 위해 부모님은 몇 년을 아끼며 텅 빈 통장 속을 채워 넣으셨다. 국립 대학교를 가라는 말씀을 등지고 서울 소재 사립 대학교를 선택한 것은 나였다. 내 욕망에 부모님은 노후 대비도 못하시고 눈물 같은 돈을 통장 속에 우겨넣었던 것이다. 무언가를 해서 돈을 벌어 보태고 싶었지만 나는 아직 만 19살도 안된 풋내기 미성년자였다. 고작 예비 대학생의 과외벌이 푼돈으로는 당장 입학 후의 생활비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1월 2일, 한 신발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 했다. 2월 말이면 서울로 올라갈 어린 학생에게 평범한 아르바이트자리는 꿈꾸기도 어려웠고 그나마 공장의 경우는 종일 일하면 어려도 꽤 벌 수 있을 거란 소리에 일하겠노라 한 것이다. 당시 겨울이라 해가 짧았다. 어둑한 아침에 아침밥도 다 못 먹고 급하게 나서야 했고 일이 마친 후 나온 밖은 이미 달이 뜬지 오래였다. 모순이었다. 공장에선 5만원부터 70만원까지의 소위 말하는 ‘메이커’ 신발들을 만들었다. 고등학교 다닐 땐 만져보지도 못했던 비싼 신발들을 하루에만 몇 백 켤레씩 원 없이 만졌다. 낮은 공장의 천장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본 적도 없는 가격대의 신발을 하필 공장에서 만난 것도 모순이었고, 소위 명문대에 합격하고는 공장에서 일해야 하는 이 상황도 모순이었다. 공장에서 고생하며 일하는 삶을 살지 말라며 대학을 가라던 세상의 말과는 달리 나는 꿈꾸던 대학을 위해 20살의 첫 달을 공장에 바쳐야 했다.
 
하루에 몇 백 켤레의 신발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흘러갔다. 공장 내부는 생각보다 너저분하지 않았고 깨끗했다. 다만, 한 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했다. 바깥 풍경에 정신이 팔리면 사고가 늘어난다는 이유로 늘 두꺼운 커튼이 창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깥을 볼 수 있는 건 12시 20분부터 30~40분간의 짧은 점심시간 뿐. 출근 때엔 해가 뜨지 않았고 퇴근 때는 이미 해가 졌으니 햇빛을 받지 못해 피부가 점점 창백해졌다. 영화 속의 좀비라도 된 기분이었다. 공장 내부의 가득한 먼지 때문에 손톱 밑을 비롯해 온 몸에 까만 먼지가 꼈고 머리카락이 푸석거리며 갈라졌다. 목이 건조해서 물을 자주 마셔야 했지만 일하는 중에 화장실을 갈 수 없어서 마른기침만 하며 버텼다. 온종일 발바닥이 까지도록 서서 근무하며 기계를 돌렸다. 보통 여자들은 시약으로 신발 사이 본드 등의 잔여물을 제거하는 마지막 공정에 배치되는데 나는 왜인지 보통은 남자가 맡는 기계를 다루게 되었다. 내가 맡은 기계는 압착기였는데 앞 공정의 아저씨가 신발과 밑창을 붙여서 넘겨주면 기계에 넣고 버튼을 눌러 강하게 압착시키는 일을 했다. 버튼만 누르면 기계가 알아서 일을 해주기는 했지만 220부터 290까지 다양한 신발 사이즈 때문에 항상 압착 면적 크기를 조절해야 했다. 내가 늦으면 앞뒤 공정이 모두 막히기 때문에 사이즈가 바뀔 때마다 신발이 밀리지 않도록 눈치를 보며 빠르게 크기 조절을 해야만 했다. 완성된 후에야 깃털처럼 가벼운 신발이지만 공정 과정에서는 무거운 추 같은 것을 넣어 신발을 제작하고 나중에 추를 빼게 된다. 그 추 때문에 하루 동안 몇 백 켤레의 납덩이같은 신발들을 압착해서 다음 벨트로 넘기고 나면 온 어깨가 비명을 질러댔다. 처음 일하던 며칠은 목 뒤부터 어깨, 팔, 다리까지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살기 위해 저녁밥을 미친 듯이 먹고 곧바로 시체처럼 잠을 잤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하루하루 어긋난 듯 아파오는 몸뚱이를 챙기는 것만 해도 정신이 없었다. 앉아서 공부만 했던 나는 여태껏 이런 고생은 해본 적도 없었고 이제야 남의 돈 벌어먹기 힘들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이해가 갔다. 하지만 인간은 또한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놀랍게도 일주일동안 정신없이 일하는 새에 몸은 점점 단련되어 공장의 시간표에 적응해버렸다. 그래, 몸이야 적응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정신이 죽어갔다. 공장일, 솔직히 말하면 학력도 필요 없고 머리 쓸 필요도 없는, 적응하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견디지 못하는 것은 그 단순?반복성이 마음을, 생각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똑같은 작업을 신발 브랜드만 바꿔가며 수 백 번 반복한다. 주 6일 근무에 야간 잔업이 겹치면 점점 내 속의 나는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 웅크려버리곤 했다. 일의 속도가 점점 빨라져 몇 십 년째 일하는 아저씨와도 차질 없이 일할 수 있게 되었지만 손이 빨리 움직일수록 눈동자 속 별빛이 하나씩 꺼져갔다. 차라리 생각을 완전히 죽이고 일만하면 좋겠는데 압착기라는 기계는 잘만 다루면 충견처럼 순종적인 반면 정신을 완전히 놓는 순간, 맹수로 돌변한다. 손가락이 잘못 끼이면 ‘으스러진다.’ 잘려나가는 게 아니라 뼈까지 완전히 으스러지는 것이다. 안전장치라고는 빨간 목장갑이 전부였으니 최소한의 정신만큼은 붙잡고 일해야 했다. 이 악물고 공부한 나를 압착기는 잔인하게 으스러뜨렸다. 몇 번을 아침마다 토하고 링거를 맞아가며 공부해서 간신히 꿈을 손에 쥔 나를, 그 꿈을 맛보기도 전에 죽여가고 있었다. 수능이 끝나 마스카라로 한껏 속눈썹을 올리고 놀러 다니는 해방된 수험생들의 세계는 공장에 갇힌 나와는 너무나 멀었다. 상한 머리카락에 까칠해진 피부로 온종일 기계만 돌리는 나와는. 초반에는 공장 아주머니들의 텃세와 고된 노동으로 어둠 속에서 늘 눈물을 흘려가며 귀가했지만 나중에는 울 기운도 없이 지쳤다. 점점 건조해지는 피부와 같이 마음속이 말라붙어갔다. 그쯤에 하혈이 시작되었다. 스트레스로 온 몸이 묶여 있었으니 몸에 이상이 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말라붙은 검은 핏덩이들을 볼 때마다 눈물로 일군 마음은 소금기에 퍼석퍼석함만 더해갔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음을 느꼈다. 절실한 건 휴식보다도 말라붙은 마음을 살리는 일이었다.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싶었지만 생활비는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 없다는 책임감이 멍에처럼 어깨를 붙들고 있었다. 나를 살게 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일하면서 그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영단어를 외워보려고 압착기에 단어 목록을 붙이고 외웠지만 손가락이 끼일 뻔 하고는 그만두었다. 결국 내가 붙잡을 것은 일하는 동안 물리적 움직임을 필요로 하지 않는 무언가. 상상이었다. 그래서 머릿속에 세계를 짓기 시작했다. 
 
공장장 몰래 옷으로 몇 겹을 숨겨 엠피쓰리로 노래를 들었다. 노래를 들으며 가사를 따라가며 상상의 가지를 뻗어나갔다. 주인공은 때로는 이별에 힘들어하는 여자였고 때로는 희망찬 내일을 꿈꾸는 소녀였다. 그리고 노래가 지겨워질 때쯤엔 내 머릿속에서만 살아 숨 쉬는 세계를 상상했다. 처음은 공기 씹는 남자라는 인물을 만들었다. 소년처럼 꿈만 꾸다가 취업도 하지 못하고 나이만 먹은 피터팬. 그는 걸어 다니면서도 수많은 상상을 하고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살아가는 가엾은 인물이었다. 정서불안처럼 끊임없이 무언가를 씹는 시늉을 하는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무얼 씹으시는 건가요? 그때마다 남자는 먼 곳을 바라보는 눈으로 대답하는데 그 말은 단어처럼 금방 흩어져버린다. “공기.” 공장에서 스토리를 짜고 퇴근하자마자 처음 썼던 소설 <공기 씹는 남자>의 내용이다. 이 남자가 머릿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하자 세계는 금방 몸을 부풀려갔다. 이번에는 자동차를 폐기하는 일을 하는 지친 중년의 남자의 이야기. 중년의 남자는 자신의 애마를 폐기하기 전, 마지막으로 누구보다도 열정으로 가득 찬 경주를 하며 죽는다. 제목은 <폐기경주>였다. 글 쓰는 재주가 대단하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야기를 꿈꾸며 버텼다. 가장 건조한 삶 속에서 이야기를 꿈꾸었다. 극한 속에서의 예술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왜 명작들은 극도의 아픔과 상처 속에서 탄생하게 되는지. 한계 상황에서 인간은 승화시킬 무언가 없이는 버틸 수가 없다. 그 지지대 역할을 이야기나, 음악, 그림이 하는 것이다. 머릿속에 이야기가 살아날 때, 선율이 떠오를 때, 하얀 캔버스 위에 붓을 놀릴 때 자신의 고통이, 두려움이, 불안과 눈물이 표현된다. 나의 고통을 미친 듯이 표현하고 나면 마지막으로 조그맣게 빛나는 희망이, 아주 아름답고도 담담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그 추웠던 겨울, 갓 스무 살을 공장에서 상처받으면서도 희망을 꿈꿨다. 그곳에서 나비를 꿈꾸었다. 봄이 올 것을 기대했고, 이야기를 끊임없이 주물럭댔다. 남들은 어린 게 지독하게도 버틴다고 했다. 그러려고 공부했냐고, 왜 국립대에 하향지원하라는 말을 듣지 않았냐고 혀를 찼다. 그들의 눈에는 내가 그렇게 공부해서 공장에서 시간이나 버리고 있는 미련한 녀석으로 비췄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그곳에서 한 것은 지루하고 끔찍한 돈벌이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꿈을 갖기 위해 누구보다도 절실해지는 법을 배웠다. 처음 겪는 절망감과 포기하지 않으려는 미련 속에서 단단한 번데기를 만들었다. 절실함 속에서 이야기가 얼마나 큰 힘을 갖는지 알았고 그 이야기가 희망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 나는 압착기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수많은 꿈의 조각을 만들어내서 마음속에 심었다. 말라붙은 마음에는 이야기들이 살기 시작했고 그것이 나를 바깥보다 더디게 흐르는 공장의 시간을 버티게 했다. 나는 품었다. 이야기를, 꿈을, 나비를.
 
마지막으로 일한 날, 판에 박힌 스케줄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던져지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벗어난다는 생각보다는 힘겹게 지켜왔던 마음에 감사했다. 그 후, 공장에서 일했다고 해서 한 학기 생활비를 완벽히 마련했던 것도 아니었고 공장 일까지 해봤으니 이제 못할 것이 없다는 용기를 얻은 것도 아니었다. 물론 일하는 동안 썼던 이야기들을 누군가에게 보여준 적도 없으며 대단한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는 일도 없었다.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그놈, 돈과의 투쟁을 계속 하고 있고 스무 살의 정신없는 한 해를 보내고 있다. 공장에서의 1월이 짧은 내 삶에 있어서 ‘극한’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 후에도 몇 번의 아픈 고비를 더 겪었다. 누구는 빛나는 스무 살이라며 반짝반짝한데 나는 후줄근한 유니폼을 입고 시험 전날에도 일해야 했고 당장의 책값에 눈물짓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 잔의 술에 웃음으로 아픔을 털어버릴 수 있는 담담함이 생긴 것은 내가 여전히 꿈꾸며 살기 때문이다. 꿈꾸는 일은 사람을 죽지 않게 한다.
 
곧 그 겨울이 다시 다가온다. 나는 겨울을 이겨내는 이 땅의 수많은 번데기들이 꽃 피는 봄에 나비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발치에 쌓인 눈물송이만큼 아름답게 피어날 나의 나비도.

 


 

당선자 인터뷰
 
열아홉의 성장통이 지금도 나를 채찍질한다
 
 
스무살을 코앞에 둔 계민경씨의 열아홉의 끝자락은 낭떠러지를 앞에 둔 절벽 같았다. 그 시절 계민경씨는 고향인 부산 북구에 있는 공장에서 신발 밑창을 붙였다. 대학 합격 후 서울 상경을 앞두고 한 학기 동안 사용할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계민경씨는 신발공장에서 10대의 마지막 성장통을 앓았다. 하지만 1년이 지난 현재. 계민경씨는 그때의 기억을 아픔이 아닌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늘 노력하게 하는 채찍이라고 말한다.
 
계민경씨가 대학에 온 후 가장 자랑스러운 일은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 독립을 한 것이다. 경제적 독립을 위해 그녀는 여전히 아르바이트를 한다. 수업이 끝난 후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기 때문에 새벽 1,2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한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가로등 아래를 걸어 기숙사로 돌아올 때면,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떠올라요.” 그녀는 상념들을 원고지 속에 글로 담아낸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수필문학상 당선’이라는 결실을 낳았다. 
 
그녀가 글을 쓰게 된 것은 아름다운 한편의 시 때문이었다. 김광균의 좧와사등좩을 읽고 그녀는 생각했다. “글자로도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저 역시 그런 글을 쓰고 싶어요.” 학과 일정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도 그녀는 아름다운 문장을 쓰기 위해 여전히 펜을 놓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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