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중석,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원장
  • 진민섭 기자
  • 승인 2012.12.09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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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의 변호인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서중석 원장은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아니다. 그보다는 ‘죽은 자들의 변호인’에 가깝다. 그의 ‘손님’은 말이 없다. 어디가 아픈지, 무엇이 문제인지 물어도 묵묵부답이다. 하지만 서중석 원장은 과묵한 손님과 더 깊은 대화를 한다. “죽음에 관해서는 본인도 왜 돌아가셨는지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세요. 저는 그분들의 조용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거죠.” 그는 인터뷰 내내 시신에 대해 예우를 갖췄다. ‘죽었다’거나 ‘사체’라는 표현은 절대 사용하지 않았다. 망자에 대한 마지막 예우이기 때문이란다. 그는 그의 역할은 ‘주연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저 묵묵히 죽은 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보호하는 게 그의 일이다. 그의 사무실엔 ‘護民助判(호민조판·국민을 보호하고 판단을 돕는다)’이라고 쓰인 커다란 액자가 걸려 있었다.


글 진민섭 기자 story@cauon.net  김순영 기자 soonyoung@cauon.net
사진 진민섭 기자

시신이 두렵지 않냐고? 나에게 시신은 스승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서중석 원장(55)을 만나기 위해 신월동에 위치한 국과수 본원을 찾았다. 인터뷰 약속시간인 3시, 10분 일찍 도착했지만 30분을 기다려야만 했다. 원장실엔 결재를 받기 위한 국과수 직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현장에 있어야 하는데 앉아서 결재만 하는 일이 어색하다”며 수더분한 웃음으로 기자들을 맞았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그가 먼저 운을 뗀다. “중앙대에 인터뷰 할만한 훌륭한 인물이 많이 없나요? 전 훌륭한 인물이 아닌데….” 이어서 그는 원래 법의학자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원래 꿈은 뭐였나요?
“의대 교수가 되고 싶었어요. 중앙대 교수가 되고 싶어서 조교까지 했는데, 결국 못 했어요. 조교까지 하고 교수가 못 된 사람은 저밖에 없었을 거에요. 성적은 좋았어요. 장학금도 타면서 학교에 다녔는데, 세상 일이 제 마음대로 되지는 않더라고요. 처음부터 ‘국과수 아니면 안 되겠다’며 시작한 분들에 비하면, 전 훌륭한 사람이 아니죠. 우연하게 시작했던 길이니까요.”


-법의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신 건가요.
“지방의 의과대학에 가기로 되어있었는데 제대로 된 장비도 없고 책걸상밖에 없더라고요. 가족과 떨어져 있는 것도 마음에 걸리던 차에 국과수 법의학과에서 사람을 뽑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처음엔 2년 정도 있을 생각으로 들어왔죠.”


-그런데 결국 국과수의 최고자리인 원장까지 오르셨네요.

“그러게요.(웃음) 처음에 들어오니까 일이 너무 많은 거에요. 그만둬야겠다는 생각도 몇 번 했었죠. 그런데 그만두려고 할 때마다 굵직굵직한 사건이 터지고, 그런 사건을 해결하다 보니까 법의학이라는 학문에 빠지게 된 거 같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국과수는 열심히 일하는 만큼 인정을 해준다는 점이 좋았어요.”

91년 국과수에 들어온 그는 21년 동안 ‘죽은 자들의 변호인’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고(故) 노무현 대통령 검안에 참여했고,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최진실 등 유명인사를 직접 부검했다. 삼풍백화점 붕괴(1995),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화재(1999), 대구 지하철 참사(2003) 등 역사적 참사 현장엔 언제나 그가 있었다.


-그동안 10,000건이 넘는 부검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면요.
“화제가 되었던 건 정다빈, 최진실씨 같은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이었고요. 법의학적으로 의미가 있던 건 삼풍백화점 사건이 아닐까 싶어요. 한 사건으로 그렇게 많은 희생자가 나온 적이 그전엔 없었잖아요. 워낙 큰 사건이라 모든 팀이 감정에 매달렸어요. 행정을 계획하는 팀, 예산을 따내는 팀, 시신을 유가족에 전달하는 팀, 모두 다 모였죠. 법의학자와 유전자 전문가, 인류학자들이 머리를 맞대서 사건을 해결한 사례에요.”

소외당했던 법의학
장의사라고까지 불렸다
그러나 묵묵히
진실을 밝힌다


-보통 사람들은 국과수의 역할을 사건 현장에서 부검을 하는 것만 생각하지 않습니까?

“사건이 일어나면 부검만 이뤄지는 건 아니에요. 돌아가신 분들이 있으면, 모두 생전데이터라는 걸 갖고 있어요. 생전에 이 사람이 키가 얼마였고, 몸무게가 몇인지, 또 어떤 수술을 했는지 등. 그런 데이터들이 모여있는 거에요. 건물이 무너져서 사상자가 100명이라고 치면, 100명을 x축으로 두고 데이터를 y축으로 대입시켜서 그 사상사가 누군지 맞추는 식으로 찾아요.”


-수백 명의 사상자가 일어나는 사건의 경우, 작업 기간도 상당할 것 같은데요.

“삼풍백화점 같은 경우는 5개월 걸렸어요. 또 대구지하철도 큰 사건이었죠. 현장에서만 4개월 걸렸어요. 화재 현장에서 발견된 시체는 뼈가 다 타버려 재가 돼버리는 경우도 많아요. 그래서 뼈에 붙은 재를 다 걷어내고 발굴하듯이 작업을 해요. 땅 파듯이하고 그러는 게 아니에요. 시신을 보존하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요.”


-대형참사의 현장에 가면 시체가 즐비할 텐데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사람들이 끔찍해서 그런 현장에 어떻게 가느냐고 묻기도 해요. 그런데 제가 하는 일인데 끔찍하다고 생각하면 되나요. 시신들은 제 스승이에요. 시신들이 저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들어주는 게 제 일이라고 생각해요.”


-무슨 말을 하던가요.
“시신은 몸을 통해 말씀을 많이 하세요. 상처 등을 통해서 대화를 하는 거죠. ‘저분은 부검실에 왜 오셨을까’라고 많이 생각해봐요. 우리 손님은 말도 별로 없으시고, 옷도 벗으시고, 차가운 침대에 누워있어요. 제가 눈이 크잖아요. 이 큰 눈으로 최대한 많은 걸 보려고 노력해요.”


-연예인들의 부검을 하는 경우엔 매스컴의 관심도 대단하죠. 부담이 되진 않나요.
“정다빈씨가 돌아가셨을 때는 국과수 로비가 기자들로 가득 찰 정도로 취재진이 몰렸어요. 보통은 뉴스데스크에서만 취재가 온다면, 그땐 연예가중계까지 왔으니까요. 사람들의 관심이 부담이 안 된다고 말하긴 그렇겠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부담을 느끼지는 않아요. 다 똑같은 시신이라고 생각하고, 관심이 많은 사건일수록 많은 정보가 주어지기 때문에 특별히 어렵지는 않아요.”

▲ 국과수에는 서중석을 사랑하는 모임 ‘서사모’가 있다. 사진은 서중석 원장의 취임을 축하하며 서사모가 선물한 취임패.


-법의학자를 ‘죽은 자들의 변호인’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억울한 죽음을 밝혀주었던 경우도 많을 것 같습니다.
“너무나 많아서 꼽기 어려울 정돈데… 2005년도 여름인데요, 대구의 문화동이라는 곳에서 일가족이 불에 타서 사망한 사건이 있었어요. 남편을 제외하고 엄마와 3형제가 모두 숨졌어요. 퇴근한 남편은 ‘불이 너무 뜨거워 구하지 못했다’며 흐느끼더라고요. 애타는 모습에 남편은 용의선상에 제외됐고요. 그런데 현장을 둘러볼수록 이상한 점이 많이 발견됐어요. 결국 유족들은 부검을 거부했지만, 부검을 진행했어요. 10일 후 부검결과를 보니 이상한 결과가 나왔어요. 피부엔 물집이 없었고, 기도엔 그을림도 없었어요. 불이 나기 전에 사망했다는 거죠. 남편이 보험금을 노리고 아내와 세 아들에게 죽였던 거에요.”


-모든 사건에서 부검을 할 수는 없을 텐데요. 어떤 부분을 의심하셨나요.
“모든 답은 현장에 있어요. 시너를 뿌리고 불을 낸 거였는데, 범행자는 불을 지르면 자국 같은 건 남아있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나 봐요. 그런데 시너를 뿌리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땅속에 스며들어요. 땅을 파보면 답이 나오는 거죠. 그리고 목격자 진술을 통해 첫 판단을 내리지만 목격자 진술은 틀리는 경우가 많아요.”


-예전엔 사망자가 계속 생기는 데도 사인을 몰라 ‘마을에 귀신이 쓰였다’는 소문이 도는 경우도 많았죠.

“비슷한 사건이 있었어요. 대전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였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여름에 비가 안 오니까 논에 관정이라는 걸 팠어요. 논이 마를 것을 대비해 밑에 구멍을 뚫어서 만드는 일종의 우물이죠. 그런데 어느 날 할아버지가 관정에서 일하시다가 돌아가신 채 발견이 됐어요. 가족들은 연세도 있으시고 하니, 힘드셔서 돌아가신 줄 알고 장례를 치렀죠. 얼마 후에 남은 가족들도 농사를 지어야 하니, 그 아들이 관정에 들어갔는데 또 죽은 거죠. 이렇게 되니까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거죠.‘귀신 붙은 관정’이다, 불길한 징조다… 그래서 국과수가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나섰어요. 알고 보니 여름이라서 관정에 세균이 많이 번식했고, 세균이 산소를 다 소모해서 산소부족으로 죽었던 거였어요. 시골이라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는데, 국과수 같은 기관의 손이 닿지 않았다면 계속 피해자가 늘어났을지도 모르죠.”

정치적 외압은 없다
망자의 원한 푸는 일에
누구도 감히
관여할 수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안에도 참여하시고,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부검도 맡으셨어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들을 맡으실 때 외압 같은 건 받아보신 적 없나요?
“전혀요. 이것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부검하는데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라는 전화를 받아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누가 저한테 전화 좀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좀 해보게.(웃음)”


-‘감히’국과수에 그런 요청을 할 수 없었다는 말씀이신 거죠?
“그렇죠. 부검할 때 혼자 하지 않아요. 비디오까지 찍어요. 이런 것 때문에, 국과수가 비교적 국민에게 신뢰를 받지 않았나 싶어요.”


-미국의 경우 법의학자만 2,000여 명 된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엔 몇 분이나 계시나요.
“국과수에는 24명 있어요.”


-그럼에도 국과수의 기술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이유는 뭘까요.
“국과수가 생긴 지 57년이 됐어요. 처음엔 연세 많은 의사분들이 통과의례처럼 부검하던 경우도 많이 있었어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의기투합하며 이 자리까지 온 거죠. 그리고 외국은 사망의 원인이 대부분 권총 때문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사인이 아주 다양하죠. 또 대형 사고가 많아요. 미국은 911 빼고는 시민들이 한꺼번에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우리는 굉장히 많죠. 그리고 역사적으로 권력에 저항하면서 의문사로 돌아가신 분들이 많잖아요. 작은 상처 하나하나까지 확인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외국에서 사용하지 않는 부검 기술을 많이 발명하게 됐죠.”


-하지만 여전히 열악한 환경에서 연구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2008년에 한 인터뷰에서 ‘국과수는 침몰하는 타이타닉이다’고 까지 말씀하셨었죠.
“그때는 너무 힘들었어요. 나름 고위공무원인데 그런 인터뷰를 하는 게 쉽지는 않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절실해서 그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사건은 몰려오는데, 예산은 적고… 다행히도 이후에 지원이 많이 늘었어요. 정밀 기계들도 세계적 수준의 기계들을 들여왔고요. 외국에서 놀랄 정도로요.”


-지난해 드라마 ‘싸인’이 방영된 후 법의학에 대한 관심도 많이 늘었죠?
“예전엔 법의관 지원자가 부족해 정원을 다 채우지 못했어요. 그런데 올해엔 정원이 다 차서 더 이상 채용할 수 없을 정도예요. 법의관이 되려고 의대에 가는 친구들도 생겼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예전엔…
“솔직히 외로웠죠. 학회에서도, 사회에서도 소외당했죠. ‘장의사’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았고요.”


-사실은 의사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데 말이죠.
“우리가 주요학문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최근에는 조연 중에 중요한 주조연이라고 해줘서 고맙죠.(웃음) 여전히 법의학은 변방에 있고 아직 발전해야 하는 부분이 많아요.”


-법의학이 주연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요. 우리는 묵묵히 우리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사회간접자본처럼 평상시에는 있어야 하는 지 모르지만, 문제가 생기면 반드시 생각나는 곳이면 족하죠. 법의학이 나라를 움직이는 주연이 되는 세상은, 모든 사람을 부검대에 올리는 사회가 아니겠어요? 그럼 안 되죠.”


-가족분들께서는 법의관으로 일하고 계신 걸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처음엔 다들 반대했죠. 둘째 아이가 ‘아빠는 왜 병원에 안 가냐’고 하더라고요. 하얀 가운입고 진료하는 아빠의 모습이 좋지, 시체 해부하고 땅파는 모습이 좋겠어요? 그런데 최근엔 지지해주는 것 같아요. 싸인 덕분인 것 같기도 해요.(웃음)”

-딱딱한 책상과는 별로 안 어울려 보이세요. 다시 현장에 나가고 싶지는 않으신가요?
“요즘에도 틈만 나면 부검실에 들러요. 원장실은 골치 아픈 일투성이에요.(웃음) 여기서 부검실 상황을 볼 수있게 만들었어요. 덕분에 매일 아침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죠. 그래도 빨리 현장에 나가고 싶어요. 현장에서 일하는 게 저한테 가장 맞는 옷인 것 같아요.”


-항상 ‘죽음’과 함께하시는데, 죽음이 보통사람들과는 다르게 다가올 것 같습니다.
“많이들 물어보는 질문이에요. 죽음이요? 물론 저도 죽음이 두려워요. 산다는 건 행복인데, 죽는다는 건 산다는 것의 반대잖아요. 다만 죽은 자들은 두렵지 않아요. 죽은 자들은 모두 제 스승이니까요.”

 

 

드라마 싸인,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죽은 자는 진실을 말하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거짓을 말하지.” 25%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종영한 드라마 ‘싸인’의 명대사다. 싸인은 오직 죽은 자와의 대화만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국과수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고 평가받고 있다. 드라마 싸인의 배경이 된 국과수, 싸인의 장면들은 현실과 얼마나 비슷할까?


한마디로 말하면 “드라마가 120이라면 현실은 80”이다. 모든 사건을 척척 해결해내는 드라마와 현실은 차이가 있다. 그리고 싸인에서 등장하는 권력과 암투, 정치적 사건들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또 김아중과 같은 법의관과의 아름다운 사랑도 없다.


법의관을 리얼하게 묘사하기 위해, 드라마 촬영이 시작되기 4달 전부터 박신양, 김아중 등의 배우들은 국과수 법의관들을 지켜보며 모든 행동과 말투까지 습득했다. 드라마에 나온 영안실과 로비는 세트장이 아닌 실제 국과수 건물이다. 이는 부검이 없는 주말에 촬영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훼손이 우려되는 부검실은 카메라에 담을 수 없었다.


드라마의 내용이 현실과 다른 부분도 있다. 국과수 원장 이명한(전광렬)과 법의학자 윤지훈(박신양)이 부검 결과를 두고 벌이는 대립 구도는 드라마이기에 가능했던 장면이다. 실제로는 같은 시신을 부검한 법의관들이 정반대의 결과를 내놓는 경우는 찾기 힘들다. 의견차가 있을 경우 조율과 논의를 거쳐 정확한 결과를 낸다.


극 중에서 나오는 정치적 외압이나, 국과수 원장이 부검결과를 조작하는 일 또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연출을 맡았던 장항준 감독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실제로는 모두가 열악한 환경에서 사명감으로 몸부림치는 윤지훈 선생이고 모두가 고다경 선생이었습니다”라며 국과수 법의학자들에 대한 실제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


드라마가 인기를 얻은 만큼 법의관에 대한 인기도 높아졌다. 몇 년 간 계속되던 국과수의 인력난도 해소됐고 법의학자가 되기 위해 의대를 진학하는 사람도 생겼다고 한다. 서중석 국과수 원장은 “‘법의관들이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는지 몰랐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며 “싸인 제작진에게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 평소엔 가운을 입지 않고 작업복을 입는다.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는 서중석 원장.

 

당신에게
중앙대란?

“사람은 대개 회귀본능이 있어서 자기가 살았던 곳이나 공부했던 곳으로 돌아가기 마련인데, 저는 중앙대를 떠나면서 ‘다시는 회귀할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중앙대에서 조교생활을 포함해 거의 13년을 보냈지만, 기쁜 마음으로 흑석동을 가지 못 했던 것 같아요. 중앙대 교수를 하고 싶었던 저에게 일종의 상처이기 때문이었을까요? 사실 지난 12월 1일, 제가 조교 시절에 학부생이었던 학생들이 마련한 사은회에 초청받았어요. 그런데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많이 하다, 결국 학교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왔어요. 아직도 제 마음엔 모교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었나 봅니다. 그런데 오늘 인터뷰를 하며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회귀할 수밖에 없는 곳이라고요. 앞으로는 모교에,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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